임기 말에 빛나는 메르켈

입력
2021.02.01 18:00
수정
2021.02.01 18: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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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21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메르켈 빈곤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코로나19 백신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보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AP=뉴시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21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메르켈 빈곤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코로나19 백신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보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AP=뉴시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신중하되 과감하다. 어린 시절 다이빙대에서 30분 동안 조용히 서 있다가 수업 종료 직전에 물로 뛰어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오는 9월 물러나는 메르켈의 과감함은 임기 마지막 해에 더 두드러진다. 집권 16년째인데 대처주의에 비견될 메르켈주의나 정치적 비전도 없다는 냉소는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나가는 메르켈에 빗대 유럽에 변화가 오고 있다고 미국이 반기는 건 그의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 메르켈의 결단은 난민 대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맞았다. 2015년 9월 국제 문제이던 시리아 난민을 그해 말까지 80만명 수용하고 그 상한선마저 없앤 것. 모두가 난민 막기에 골머리를 앓을 때 이들에게 숙소를 주고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런 탓에 2년 뒤 총선에선 우익 반이민자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메르켈은 5연임에 실패했다. 하지만 세계에 나치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기억을 전복시킬 계기를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런 메르켈이 최근 조 바이든 미국 정부에 한 방을 날렸다.

□ 메르켈은 이번 다보스포럼 사전 화상회의에서 다자 협력을 강조한 시진핑 중국 주석 발언에 공감을 나타냈다. 저기는 미국, 여기는 중국 하는 편 가르기에 반대한 것이다. 메르켈이 이끈 유럽연합(EU)은 작년 12월엔 바이든 진영의 유보 요청을 뿌리치고 중국과 포괄적 투자협정(CAI)을 맺었다. 미국에 손가락 하나로 인사했다는 비유, 유럽을 속국화하려는 중국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비판에도 메르켈은 흔들리지 않는다. 포스트 코로나19 이후 경제를 중국을 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미국은 ‘노르트 스트림2’에 제재 경고로 대응했지만, 이마저 메르켈을 움직이는데 실패하고 있다. 러시아 천연가스를 독일 발틱 연안으로 잇는 1,200km의 해저 파이프라인 공사는 75km만 남겨 둔 상태다. 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미국은 메르켈 행보가 스위스 같은 중립지대로 가는 걸로 본다. 물론 중립지대는 무법지대가 될 거란 경고가 붙어 있다. 경제에서 미중 양국에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으론 어디에도 연계하지 않는 외교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국제 질서 유지자로서의 미국 위상과 중국의 경제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대한 고민과 결단은 메르켈만의 것은 아니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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