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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영웅, 소수민족 로힝야 탄압'... 아웅산 수치 영욕의 반평생

입력
2021.02.01 18: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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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현대사 상징, 15년 가택연금
노벨평화상 수상하며 통합 구심점에
로힝야 문제 등 5년 현실 정치 장벽도
군부 쿠데타로 재구금, 재기 가능할까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양곤=AFP 연합뉴스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양곤=AFP 연합뉴스

아웅산 수치. 조국 미얀마보다 더 친숙한 이름이다. 그의 76년 삶은 오롯이 미얀마의 현대사다. ‘군사 독재→민주화→소수민족 탄압’이라는 역사의 흐름에서 그는 공과도, 영욕도 함께 누렸다. 가택연금 15년에 이어 현실 정치라는 장벽 5년에 갇혔던 그가 1일 군부 쿠데타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수치는 1945년 6월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의 딸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된 뒤 인도와 영국에서 자랐다. 1962년부터 그의 조국은 군부가 통치했다. 1972년 영국인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1988년 4월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귀국했다.

그는 시민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죽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목도했다. 귀국 넉 달 뒤인 8월 50여만명이 운집한 양곤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민주 투사로 거듭났다. 민주화 세력을 망라한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도 창설했다. 공정 선거 대신 계엄령을 선포한 군부는 이듬해 수치를 집에 가뒀다. 1990년 5월 서방의 압력으로 치러진 총선에서 NLD가 압승했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 강도를 높였다.

1991년 노벨위원회는 가택연금 중인 수치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시상식엔 남편과 두 아들이 수치의 대형 사진을 들고 참석했다. 수치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직접 평화상 수락연설을 한 건 21년 뒤인 2012년이다. 1995년 처음 석방됐으나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숨졌을 때 입국 금지를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다. 여러 차례 석방과 가택연금을 오간 끝에 15년만인 2010년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그 사이 국제사회와 각국은 수많은 인권상과 명예시민권을 그에게 안겼고, 국민들은 ‘아메이 수(어머니 수치)’라는 영예를 선사했다.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 학살' 재판에 참석한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헤이그=로이터 연합뉴스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 학살' 재판에 참석한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헤이그=로이터 연합뉴스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승리했으나 가족이 영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국가고문에 임명돼 실권자가 됐다. 2017년 라카인주(州)에서 벌어진 미얀마군의 토벌로 집단 성폭행, 학살, 방화 등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 수천 명이 사망하고, 70만명 이상이 난민 신세가 됐지만 수치는 침묵하거나 군부를 두둔했다. 심지어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 학살’ 재판에 참석해 “국제인권법 위반이 있었다 하더라도 집단 학살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사건 기각을 촉구했다.

국제사회는 ‘두 얼굴의 수치’라며 그에게 수여한 인권상과 명예시민권을 박탈했다. 노벨상 수상 철회 목소리도 여전하다. 반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수치가 기성 정치판에서 보여준 처신에 그만큼 실망했다는 방증이다.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군부와 공존해야 하는 수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총선의 압도적 승리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결국 석 달 만에 군부에 의해 다시 구금되는 처지에 놓였다. 외신은 로힝야족마저 군부를 규탄했다고 전했다. 수치는 재기할 수 있을까.


쿠데타로 얼룩진 미얀마 현대사. 그래픽=김대훈 기자

쿠데타로 얼룩진 미얀마 현대사. 그래픽=김대훈 기자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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