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두지 않겠다" "참아라" 성폭력보다 끔찍한 2차 가해

입력
2021.02.02 04:30
성희롱 피해자 4명 중 1명 2차 피해까지
청소년은 온라인 괴롭힘 탓 극단 선택도

게티이미지뱅크

“처음엔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니까 열 받기도 하고 겁도 났어요. 소문 내고 다닐까봐 걱정도 됐고요.”

2018년 17세였던 A양은 B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두 달이 지나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가해자인 B군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깡패 형들에게 말하겠다”며 A양을 협박하면서, 분노와 걱정이 쌓였기 때문이다.

A양은 2018년 9월 15일 새벽, 전주의 노래방에서 친구를 통해 B군을 만났다. B군은 “형들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달라”며, 모텔로 옮겨 술을 마시다가 A양이 정신을 잃자 성폭행했다. A양 카드로 노래방과 모텔에서 결제까지 했다. 모텔에서 눈을 뜬 A양은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B군은 범행 직후 “미안하고 후회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후 연락을 끊었다.

A양은 이 사건 이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반복적 자해로 입원하는 등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A양은 경찰 조사에서 “B군이 성폭행을 해놓고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니까 너무 화가 났다. B군은 아무일 없던 것처럼 지내는데 나만 힘들게 사는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전주지법은 2019년 7월 B군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지 않고,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범행 이후 피해자에게 겁을 줄 목적으로 협박까지 했다. 피해자를 법정에 나오게 해서 2차 피해까지 입게 했다”고 밝혔다.


장혜린(가명. 16)양이 2019년 자필로 작성한 일기장 일부. 성폭행 피해자였던 장양은 "말하고 싶어도 반응이 감당이 안 될 것 같다"고 적었다. 우리 사회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밝혔을 때 피해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 봤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양은 피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또 다른 학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지난해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양 유족 제공


“2차 피해 없는 성폭력 사건은 없다”

성폭행 피해와 이어진 2차 가해에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9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혜린(가명·16)양 역시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온라인에서 특정인을 대상으로 집단적·지속적·반복적으로 모욕·따돌림·협박하는 행위)이라고 불리는 2차 가해 피해자였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19년 11월 두 살 많은 남학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장양은 지난해 고교에 진학한 뒤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강간 피해사실이 언급되는 등 또래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2차 피해를 입었다. 가해 학생들은 단체 채팅방에서 또 다른 교실을 창조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장양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주로 변호해온 이은의 변호사는 “성폭력 고발 사건에선 정도 차이만 있을 뿐, 2차 피해에 노출되지 않은 사건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 정의하는 ‘2차 피해’란 피해자가 수사·재판·보호·진료 등 사건처리 및 회복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를 뜻한다. 집단 따돌림, 폭행·폭언, 신분상 불이익 등이 대표적이다.

2018년 4월 교내 성폭력을 공론화한 학생 인권운동 '스쿨미투'를 시작한 서울 용화여고 졸업생들은 가해 교사와의 소송과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에 시달리는 경우다. 학교 졸업생들로 꾸려진 ‘용화여고성폭력 뿌리뽑기위원회’(뿌리뽑기위원회)에서 교사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한 뒤 교사 18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가해 정도가 심하고 피해자가 많았던 교사 C씨에 대한 재판에 성추행을 당한 졸업생들이 증인으로 나섰다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됐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최경숙 활동가는 "C씨가 해바라기 센터(성폭력피해자 지원기관)에서 증언한 피해자에게 만나자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 피해자가 공포에 질렸다"고 말했다. 징계를 받고 학교로 돌아간 일부 교사가 재학생들에게 "누가 신고했는지 찾아내겠다"고 말한 사실도 뿌리뽑기위원회의 귀에 들어왔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성희롱 피해자 4명중 1명, 2차 피해 경험

여성가족부가 공공기관과 민간업체 직원 1만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1%가 최근 3년간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성희롱 피해자의 4명 중 1명(27.8%)은 ‘2차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2차 피해 유형으론 ‘주변에 성희롱 피해를 말했을 때 공감이나 지지받지 못하고 의심 또는 참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부당한 처우에 대한 암시 및 심리 위축 발언으로 성희롱을 축소 또는 은폐하려 했다’, ‘기관장(사업주)이나 상급자가 행위자 편을 들거나 조사가 불공정했다’ 등의 응답도 있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폭력 피해보다 2차 피해가 피해자에게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1차 피해에 따른 영향에 대해 ‘특별한 영향이 없다’란 응답은 47.3%였지만, 2차 피해에 대해선 '영향 없다'란 대답은 26.0%에 불과했다. 2차 피해 후유증이 1차 피해 못지 않게 크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은의 변호사는 “1차 피해가 인정되면 피해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돼주지만, 인정을 못 받을 경우엔 2차 피해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차 피해가 성인보다 온라인에 익숙한 청소년에게 더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지적한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김봉섭 연구위원은 "청소년 피해자는 교실에서 가해자를 알고 지내기 때문에 온라인에서도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피해가 누적되다 보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결국 출구를 못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박소영 기자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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