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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가' 선동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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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의외였던 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한 발언이었다. 2015년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는 내용과 절차 모두 잘못됐다고 질타했던 3년 전과는 판이했다. 위안부 피해자 단체가 지난주 수요집회에서 “대통령의 일성에 충격을 넘어 참담함을 느낀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정도다.
이번 판결은 보편적 인권이 주권 면제(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 원칙)에 우선한다고 선언했다. 일본이 저지른 전시 성폭력 범죄가 시간과 국경을 넘어선 반인도적 범죄 행위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드물다. 일본이 공식 사죄, 진상 규명, 미래세대 교육이라는 근원적 해법을 외면해온 점을 감안하면 국내 사법부가 내린 ‘정의의 선언’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에 박수만 보내기엔 걸리는 대목이 적지 않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재판의 당사자가 된다는 건 완벽한 법질서가 구현되는 세계 정부가 있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현실의 국제 사회는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냉정한 세계다. 사드(THAAD)를 배치했다고 노골적 경제 보복을 가한 중국을 상대로 우리가 제대로 된 항변조차 못한 것을 떠올려보라.
주권 면제는 국제 관습법으로 자리잡은 관행이다. 물론 강대국들은 국제법도 수시로 어긴다. 하지만 영토가 작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는 다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됐던 네덜란드는 전후 헤이그를 국제법 중심 도시로 만들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와 전범재판소를 유치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에 포위된 네덜란드가 의지할 곳은 국제법 질서라는 판단에서였다. 네덜란드 사례는 국제법을 대하는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국경을 넘어선 재판권을 인정하려면 우리가 남의 나라 법정에서 피고로 서는 것도 용인해야 한다. 이미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한국 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상태다. 이들이 자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배상 판결을 내린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것인가.
국가 차원의 전시 성폭력 범죄에 희생당한 위안부 피해자의 기본권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주권 면제의 보호를 받는 외국 국가를 상대로 기약도 없는 배상금 집행 절차를 밟도록 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판결의 실효성을 찾는 건 외교의 영역이라고 말한다면 무책임하다. 이런 사정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비슷한 사건의 선고를 갑자기 연기한 이유가 아닌지 유추해본다.
이상주의와 원칙론을 앞세웠다가 갈 길을 잃은 건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사람은 마땅히 친일파로 불러야 한다”며 대일 항전을 독려했으나,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지금은 일본과 관계를 풀어보려고 몸이 달아 있다. 심지어 배상금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속내도 공공연히 내비친다. 국회의원 시절 '일왕'이란 표현을 쓰자고 주장해 일본 측 반발을 샀던 강창일 신임 주일 대사가 부임 첫날 “천황폐하”라고 칭한 건 '죽창가' 선동이나 감성적 접근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역사를 대할 때 필요한 건 균형 감각과 냉철한 이성이다. 한일관계를 이상주의로 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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