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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진보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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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해방 후 미군정에 제일 먼저 저항해 항쟁을 일으킨 도시는?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이승만 정권에 저항해 시위를 벌려 4·19혁명을 촉발시킨 도시는? 1960, 70년대 삼엄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서 ‘지하조직’을 통해 ‘진보변혁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지역은?
이 세 도시가 모두 대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대구는 이제 한국 ‘보수세력의 성지’, 진보세력이 보기에는 한국 ‘수구세력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가 보수화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대구는 원래 좌파가 강한 ‘한국의 모스크바’였고, 대표적인 ‘야당도시’였다. 미군정 시기였던 지난 1946년 10월부터 연말까지 미군정에 저항해 거의 전국적으로 ‘추수봉기’라고 부르는 항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촉발시킨 것도 바로 대구였다.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가 고향인 구미의 경찰서를 공격하고 도주하다가 사살당한 것도 바로 이 ‘대구 10월 항쟁’ 때였다(과거, 그리고 지금도 보수세력은 이를 ‘대구 폭동’이라고 부르고, ‘대구 10·1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대구에서 왜 10월 항쟁이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다. ‘구조적인 원인’과 직접적인 격발쇠가 된 ‘사건사적 원인’이다.
“쌀을 주소! 배고파 죽겠소!” 1946년 10월 1일, 당시 대구의 중심지였던 대구역 앞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미군정에 기아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해 9월, 좌파가 이끄는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의 주도 아래 철도노동자 등이 총파업을 벌였고 이에 참여한 대구노동자들은 이날도 시위에 들어갔다. “탕탕탕!” 저녁 무렵 경찰과 시위대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갑자기 경찰이 총을 쐈다.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한 것이 대구 10월 항쟁이 폭발한 직접적인 이유, 즉 사건사적인 이유이다.
이는 단지 휘발유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 구조적인 이유는 이미 누적돼 있었다. 우선 친일경찰이다. 미군정은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경찰을 그대로 고용했고 이들은 해방 후에도 좌익을 때려잡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다. 대구경찰서 앞을 지나가면 대낮에도 고문을 못 이기고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렸고, 여러 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이에 민중들의 분노는 타오르고 있었다. 둘째로 민생고이다. 미군정은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농민들의 농지개혁요구를 묵살했으며, 친일경찰들을 동원해 쌀을 강제로 공출해갔다. 게다가 쌀 배급정책의 실패로 서민들은 쌀을 구할 수가 없었다. 특히 대구 일대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미군정은 대구를 봉쇄했고 그 결과 시민들은 생필품을 구할 수 없게 됐다.
이처럼 민중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는 가운데 경찰이 노동자를 사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0월 2일 아침, 흰 가운에 마스크를 쓴 의대생들이 노동자의 시신을 실은 들것을 들고 시내를 돌자 중고등학생들이 합류했고 일반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부 연구는 항쟁에 대구시민의 절반이 참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과장된 것이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동참했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반공정권들과 보수세력들은 이 항쟁을 조선공산당 등 좌파세력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사실이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최근 조사가 밝혀줬듯이, 이 항쟁은 노동자 파업 속에서 그동안 누적된 미군정에 대한 불만과 노동자의 사망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온 민중항쟁이었다.
시내를 돈 시민들은 대구경찰서에 도착했고 압도적인 수의 시민들에게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군중을 해산시키겠다는 좌파인사들의 약속을 믿고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켰다. 하지만 좌파인사들도 시민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유치장을 부셔 정치범들을 석방했고 무기고를 부셔서 200여정의 소총 등을 탈취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대구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가 전날 노동자 사망에 분노해 경찰을 공격했고, 이에 경찰이 응사해 17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경찰에 억눌려 살던 기층민중들과 ‘부랑자’들은 친일경찰에 대한 피의 복수를 가했다. 수십 명의 경찰이 죽고 140여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일부 군중들은 부잣집과 친일파들의 집을 털어 생필품과 식량을 거리에 쌓아 놓고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10월 2일 저녁, 미군정은 장갑차를 동원해 대구경찰서를 탈환하고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항쟁은 경북지역으로 번져갔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사태가 진정되자 경찰과 우익단체들은 응징에 나섰다. 미군정은 시위대가 48명 죽었다고 집계했지만 일부에서는 3,000명이 죽고, 3,000명이 실종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태수습 후 대구지역에서만 2,250명, 경북에서 7,400명이 검거됐다. 이들은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단체들의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 정부는 10월 항쟁 관련자들과 좌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예비검속’하여 가까운 가창골과 코발트광산 등에서 집단학살했다. 이 때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1만 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전의 영광을 잃었지만, 대구역은 웅장한 복합상가로 변했고 또 다른 항쟁의 무대였던, 바로 옆의 시민회관은 콘서트홀로 바뀌었다. 파업을 주도했던 대구운수노조 사무실은 이제 헐려 재개발공사가 진행 중이고 미군정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75년 전 친일경찰과 미군정의 실정에 분연히 일어났던 대구시민들의 항쟁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대구중부경찰서로 이름이 바뀐 대구경찰서, 조선공산당과 좌파연합단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있었던 3층 건물, 아직도 총격전의 흔적이 남아있는 낡은 뒷골목의 여러 건물들은 옛 모습을 유지한 채 사라진 ‘한국의 대표진보도시 대구’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대구 10월 항쟁을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농지개혁을 지연시키면서 식량공출정책을 강제적으로 시행하고 식량난이 심화되자 이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이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정부가 유족들에 대해 사과하고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지역의 보수적인 분위기 탓인지, 이 항쟁은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위령사업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남대구를 조금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구시민들이 바람을 쐬려 자주 나들이 하는 가창저수지와 가창댐이 나타난다. 이 항쟁과 관련된 집단학살의 현장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유가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가야 했다. 4·19혁명이 나자 이들은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세우는 등 추모작업을 시작했지만, 5·16쿠데타 후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 후에야 유가족들은 처음으로 가창댐에 모이기 시작했고 매년 7월 31일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유가족들은 2018년 가창골이 내려다보이는 가창댐 건너편 언덕에 이들을 추모하는 하얀 백비를 세웠다. 유가족들은 집단학살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위령사업 역시 달성군이 2018년 학살현장인 가창면 용계리에 일년 내에 위령탑을 세우겠다고 발표했지만, 진척이 없다.
‘원혼비(?魂碑).’ 가창저수지 건너편 언덕에 세워진 작은 이 백비에는 ‘원통한 혼들의 비’라는 한문글씨가 검은 색 페인트로 쓰여 있다. 너무도 소박해, 보는 이를 처연하게 만드는 이 백비는 아직도 제대로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10월 항쟁의 억울한 희생자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비는 또 우리의 역사바로세우기와 과거사 청산이 어디에서 멈춰있는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역사의 증인이다. 아직 자신들의 한을 풀지 못한 대구지역 1만여 원혼들의 슬픈 통곡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창골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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