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정치인들의 안쓰러운 아부 경쟁
국민보다 친문만 바라보는 정치행태
열성지지층에만 기대서는 미래 없다
적어도 세계사적 인물은 돼야 ‘누구누구 보유국’이란 말이 어울린다. 그런데 ‘문재인 보유국’이라니. 댓글 싸움판에서 과장이나 조롱으로 쓰이는 이 말을 중진 정치인에게서 진지한 어투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스스로도 머쓱했던 것 같다. 뒤늦게 서울시민 전체로까지 자랑스러운 보유 대상을 늘린 걸 보면. 그의 경쟁자는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대통령’이라는 극상의 찬양을 올렸다. 민주화운동, 4선 의원, 장관 경력에 천만 시정을 책임지겠다는 이들의 수준이다.
말 난 김에 ‘보유국’ 용어가 어색지 않은 우리 현대 정치인이라면 박정희·김대중 두 대통령 정도일 것이다. 박정희는 20세기 저개발국의 발전 모델에 관한한 독보적인 지적소유권을 인정할 만한 인물이다. 전후 최빈국을 오늘날 G7 문턱에까지 이끈 산업화의 기반을 닦음으로써 모든 개도국들의 실증적 전범을 만들었다. DJ는 민주주의 신념가로 독재와 죽음의 질곡을 딛고 국제평화체제 구축과 경제 회복에 진력함으로써 글로벌 지도자의 반열에 들었다. 호불호가 어떻든 이들은 국가 방향을 제시하고 힘을 결집해 새 길을 열어간 지도자들이었다.
문 대통령은 농담으로라도 이런 용어를 쓸 대상이 못 된다. 그는 새 길 아닌 그냥 익숙한 옛길을 갔다. 공정·정의를 표방했으되 주변의 불공정과 불의에 눈감고, 통합을 약속했으되 도리어 분열과 적대를 정치동력으로 삼았다. 그나마 평가받는 코로나방역은 온 국민이 이 악문 덕분이고, 경제선방이란 것도 국가에 대한 기대를 접은 기업들의 각자도생 몸부림 덕이다.
이전 글에서 이낙연 대표의 사면 제안이 문 정권의 첫 통합 메시지라는 데 주목했다. 실행 여부보다 배경의 인식전환에 시선을 뒀다. 나아가 정권을 사실상 지배해 온 맹목 친문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봤다. 신년기자회견을 보고 일말의 기대마저 버렸다.
속내 복잡했던 듯 이리저리 꼰 말은 결국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사면 못 한다’는 것이었다. 찬반 여론은 반반이었으나 지지층의 반발이 더 컸다. 할 일이었다면 비공감을 핑계 댈 게 아니라 스스로 공감대를 넓혀 가야 했다. “용서와 통합으로 더 큰 나라를 만드는 게 옳다”고 설득했어야 했다. 그게 지도자다. 실제 사면이야 차기정부 전까지면 그만이다. 다만 국민통합의 단초만큼은 보였어야 했다. 다른 얘기지만 명분을 넘어 중도층을 흡수하고 보수층을 흔드는 영리한 현실 카드로도 유효했는데도.
일련의 사면 해프닝을 통해 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은 친문의 막강한 장악력이다. 중진 정치인들의 낯 뜨거운 아부 릴레이가 정작 문 대통령이 아니라 열성 지지자들을 향한 것이라는 게 희극이고, 나아가 문 대통령조차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포획된 모습은 더 희극적이다.
본래 문 대통령과 친문은 합리적 가치 공유의 관계라기보다는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해’ 식의 정의(情誼)적 유대에 가깝다. 이런 관계에서는 이성적 판단이 작동할 여지는 갈수록 줄고 익명 집합의 속성상 책임지지 않는 극단주의로 흐르게 됨은 필연적이다. 본격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 과격한 꼬리의 움직임이 거꾸로 머리를 쥐 흔드는 양상이 갈수록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공정과 통합의 시대정신은 다시 말도 꺼낼 수 없게 될 것이다.
당장의 지지율이 어떻든 극단주의의 확장성은 제한적이다. 결국은 좌고우면하는 온건중도층이 정국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열성 지지층에나 기대는 정치로는 훗날을 기약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문재인 보유국’ 따위의 허사(虛辭)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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