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장쑤성 ④ 우시 삼국수호성, 쑤저우 호구
태호(太湖) 북쪽 우시(无?)에 영화 드라마 촬영장이 있다. 삼국성과 수호성이다. 1987년 개장 이후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했다. ‘삼국연의’ ‘수호전’은 물론이고, 무협인 ‘사조영웅전’ ‘소오강호’와 ‘무미랑전기’ ‘미인심계’ ‘꽃 피던 그해 달빛’ 등을 찍은 곳이다. 예쁘게 색감을 입힌 드라마와 다르니 기대를 낮춰야 한다. 5A급 관광지라 입장료는 2만원이 넘는다. 베이징의 고궁보다 저장성에 있는 명청궁원(明??苑) 입장료가 3배나 비싼 중국이다. 고궁은 공짜로 물려받았지만 촬영장 조성엔 거액을 들였으니 비싸게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중국식 사고방식이다.
조조는 마차에, 유비는 맨땅에...삼국지와 수호지 촬영장
금색으로 치장한 수졸이 지키는 삼국성으로 들어선다. 삼국시대 인물 석상이 진열돼 있다. 촉나라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과 함께 맨땅에 서 있고 오나라 손권은 말을 타고 있다. 가장 멋지게 등장하는 인물은 조조다. 칼집을 잡고 마차 위에 서서 멀리 바라보고 있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면 위나라 군영과 선박이 이어진다.
도원, 와룡강, 팔괘진을 지나 호수로 이동하니 오나라 왕궁이 나타난다. 정말 웅장하게 지었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 신용전으로 들어간다. 왕비나 공주처럼 왕좌에 앉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라고 만든 공간이다. 주유가 지휘하는 점장대를 지나면 오나라 군영이 나오고 적벽대전 무대로 접어든다.
오나라 깃발 앞에서 파초선(芭蕉扇)을 든 제갈량이 서 있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착각이 든다면 소설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함선과 목책이 호수 안에 잠겨 있다. 2008년과 2009년에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두 편이 상영됐다. 할리우드 냄새가 지독했다. 적벽에서 날아오른 비둘기가 장강을 건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10년에 가오시시 감독이 95부작 드라마 ‘삼국’을 내놓았다. 소설 삼국지의 전편을 아우르는 대작이다. 적벽대전이 임박하자 조조는 술잔을 높이 들고 단가행(短歌行)을 읊는다. 41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시인 조조가 술잔을 높이 들고 우렁차게 ‘천하를 내 품에’라고 웅변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술잔 들어 노래하리, 인생이 길면 얼마나! 아침 이슬처럼 짧건만, 지난 세월 너무나 길었네. / 노랫가락 드높아도, 근심은 잊히지 않는구나. 어찌하면 떨칠까나? 오로지 술잔을 들 뿐이라. / 올곧은 현인의 옷자락, 내 마음에 맴도는구나. 그대 군자들 있기에, 지금껏 깊이 애모하네. / 사슴 무리 슬피 울며, 들판의 풀을 뜯듯. 귀한 손님 나에게 오면 비파 타고 피리 불리라. / 밝고 밝은 저 달, 언제쯤이면 거둘까나. 달빛 따라온 시름, 끊을 수가 없구나. /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몸 숙여 영접했네. 잔치로 회포 나누며, 깊은 인연에 감동하네. /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둥지 찾아 날아간 새 떼. 나무를 아무리 둘러봐도, 기댈 가지 없구나. 산은 높음 마다치 않고, 바다는 깊음 마다치 않네. 인재를 반긴 주공처럼, 천하를 내 품에."
"?酒?歌, 人生?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 慨?以慷, ?思?忘. 何以解?? 唯有杜康. / ??子衿, 悠悠我心. 但?君故, ?吟至今. /??鹿?, 食野之?. 我有嘉?, 鼓瑟吹笙. / 明明如月, 何?可?? ??中?, 不可??. / 越陌度阡, 枉用相存. 契???, 心念?恩. / 月明星稀, ??南?. ??三?, 何枝可依? / 山不?高, 海不?深. 周公吐哺, 天下?心."
역사에서 적벽전투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중국 CCTV의 강의 프로그램 '백가강단'을 통해 이중텐 전 샤먼대 교수는 삼국지 열풍을 일으켰다. 적벽의운(赤壁疑云) 편에서 70%가 거짓이고 30%만 사실이라 했다. 의운은 의심이란 뜻이다. 적벽전투는 배송지가 주석한 정사 삼국지의 '가후전'에 등장할 뿐이라고 한다. 장강까지 남하한 조조 군대는 유비와 손권의 군사력을 얕잡아 보다가 시간을 허비했다. 유비와 손권이 손을 잡는 사이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조조 군대는 전염병까지 돌자 첫 교전에서 패배한 후 어렵사리 회군했다.
손권의 ‘오주전’, 유비의 ‘선주전’ ‘제갈량전’ ‘주유전’ ‘노숙전’ 등 어디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드라마 ‘삼국’의 적벽대전은 동남풍이 불고 화공에 무너지는 조조를 그린다. 삼국성은 이 드라마의 제작 현장이다. 전투 장면을 떠올리면 그저 감동이다. 원작이 훌륭하니 드라마도 재미있다.
수호성도 태호를 끼고 있다. 양산박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송나라 황궁과 관청, 사찰도 있다. 소설 속 공간이 줄줄이 이어진다. 풍물 거리로 만든 수도 카이펑의 청명상하가(?明上下街)에 대송공평칭(大宋公平秤) 저울이 있다. 체중을 재면 천년의 기운으로 재물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공짜로 몸무게를 재는 셈 치면 재미있다.
수호지도 허구다. 민란을 일으킨 송강과 몇몇 인물을 빼면 영웅호걸이 모두 가공인물이다. 역사에서 송강의 민란은 불과 36명이 주도하고 깃발을 든 소요였다. 조정이 치열하게 토벌을 벌였다고 보기 어렵다. ‘송사’에 따르면 '송강 등이 횡행하는데도 관군이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그를 사면해 방랍(方?)의 민란을 토벌하는 데에 투입해 속죄하도록 하자’는 상소가 있다. 호부상서를 역임한 후몽의 생각이었다. 아마 수호지의 작가는 이 모티브에 착안한 듯하다.
땅이 넓어서인지 중국 전역에 촬영장이 엄청 많다. 10대 촬영장을 꼽기도 한다. 그중 4곳을 봤다. 허베이성 줘루, 저장성 헝덴과 상산, 닝샤후이족자치구 인촨에 있는 전베이바오다. 한국 드라마 ‘선덕여왕’과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 등을 촬영한 전베이바오가 가장 추천할 만하다. 입장료를 내도 별로 아깝지 않았다. 우시의 ‘영화드라마촬영기지’는 10번째 안에 끼지 못한다.
왕희지와 미불, 합려의 무덤에서 글 솜씨를 겨루다
우시 남쪽 쑤저우에 있는 호구(虎丘)를 찾아간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오왕 합려의 장지다. 장례를 치르고 3일 후 백호가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는 전설이 있다. 호랑이가 꿇어앉은 모습과 이렇게 닮아서 부른다는 말도 있다. 호구(虎口)가 아닌 언덕이다. 해발 34m 호구산은 해용산(海涌山)이었다. 지금은 하나의 구(?)에 불과하지만 진시황이 통일 후 오나라 이름을 따서 오현(??)을 설치했다. 오중제일산(?中第一山) 패방을 지나 해용교를 건넌다. 자연스레 형성된 해자에 유람선이 정박 중이다.
옛 오나라의 장관을 한눈에 관람한다는 고오람승(古???) 편액이 보인다. 노란 담벼락 위의 용마루가 검은 기와지붕보다 짧다. 10세기 오대 시대에 세운 운암사 산문이다. 문이 가운데 하나였는데 청나라 건륭제 때 양쪽에 쪽문을 만들었다. 쪽문 하나씩 차지한 산청(山?)과 수수(秀水) 편액이 맑고 아름다운 호구를 자랑한다. 호구에서 하루 묵은 청나라 강희제가 친필 호부선사(虎阜?寺)를 하사했다. 구나 부는 같은 뜻인데 황제가 사용해서인지 색다른 품격이 느껴진다. 살짝 탑이 시야에 잡힌다. 호구의 상징은 바로 탑이다.
육각형의 샘물이 나타난다. 소박하다는 감(?)과 천(泉) 사이에 점 두 개를 찍혀 있다. 앞 글자와 같다는 표시이니 감감천이란 말이다. 6세기 남조의 양나라 때 눈이 먼 고아가 있었다. 출가해 주지의 노비로 살았고 감감이란 법명을 받았다. 어느 날 신비한 기운을 느껴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샘물이 나오면 개구리가 돼 우물을 지키리라’ 중얼거렸다. 하늘도 감동해 샘물이 솟았고 계속 눈을 씻으니 광명을 찾았다는 전설이다. 자세히 보면 우물 바깥에 감감천 글자가 또렷하다. 북송시대 왕안석의 정적이던 여승경의 필체다.
왼쪽 길로 들어서니 용취산장(?翠山庄)이다. 담장에 용(?), 호(虎), 표(豹), 웅(熊)이 있으니 평범한 인물이 기거한 곳은 아닌 듯하다. 청나라 동치제 때 장원으로 급제한 홍균이 지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과 외교 행정을 담당한 총리아문의 대신을 역임했다. 노모의 초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온 그는 서른다섯 살이나 어린 15세의 명기 조채운에게 한눈에 반했다. 이듬해 1887년 첩으로 삼았다. 몽란(??)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산장에 기거했다. 홍균이 외교사신으로 유럽 4개국을 순방하자 정실부인의 요청에 따라 동행했다. 베이징으로 귀환한 후 홍균이 사망하고 43년이나 더 살았다. 새금화(?金花)라 개명하고 결혼과 화류계 생활을 반복하며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산장 뒤 냉향각(冷香?)을 지난다. 강희제의 행궁으로 사용했으나 소실됐다가 1930년대 한 승려가 중건했다. 담장 동문(洞?)과 휘어지며 자란 나무가 잘 어울린다. 원인약지(?引若至) 편액과 구도를 맞췄다. 멀리서 부르니 가까이에 있는 듯하다는 뜻이라 가지 사이로 나타난 탑이 바로 눈앞인 듯하다. 10세기 중반 오대 시대에 세운 탑으로 강남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호구탑은 47.7m 로 7층 8면 목전석탑(木?石塔)이다. 석탑의 골격에 나무와 벽돌이 함께 사용됐다. 동북쪽으로 최대 3도59분가량 기울어져 있어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린다. 예로부터 호구탑을 보고 나서야 소주성을 찾는다고 할 정도로 랜드마크다. 송, 명, 청나라를 거치며 7차례나 화재가 발생해 그때마다 중건했다. 명나라 숭정제 시대에는 7층만 소실됐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운동 때 방화를 당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옛 모습으로 중건해 지금에 이르렀다. 호구탑 앞에 운암사가 있다. 대웅보전에는 도금된 석가모니 좌상이 있고 두 제자가 협시하고 있다.
대웅보전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광장이 나타난다. 청색의 천인좌(千人坐) 석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명나라 관리이자 서예가인 호찬종의 필체다. 명필로 유명해 취푸의 공묘에 있는 패방에 금성옥진(金?玉振)을 남기기도 했다. 바로 앞에 거대한 암반인 천인석이 있다. 지방지인 오군도경속기(?郡????)에 ‘골짜기에 평탄한 바위가 있는데 1,000명을 수용할 수 있어 예로부터 천인좌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조의 유송이 통치하던 5세기 초반 쿠마라지바의 제자 축도생이 호구에 와서 설법했다. 바위 위에 1,000여명이 앉아 경청했다.
정자를 사이에 두고 천인좌와 대칭으로 호구검지(虎丘?池) 석각이 붉디붉다.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아들인 안군이 썼다고 한다. 안진경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부친 이름인 호(虎)를 쓰지 않았다. 아들이라고 썼을 리 없다. 명나라의 화가이자 서예가인 당백호의 '호구'와 안군의 '검지'를 나란히 붙였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필체 구분이 어려워 그냥 안군이 썼다고 해도 믿겠다.
검지는 오왕 합려의 무덤 자리다. ‘사기’의 자객열전에 따르면 합려가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한다. 자객은 생선에 숨긴 어장검으로 성공을 거둔다. 합려가 호구에서 사망하자 아들 부차가 장례를 치렀다. 무덤 입구에 연못을 만들었고 어장검을 비롯해 보물을 함께 매장했다고 알려졌다. 부차는 매장 후 천인석에서 공사에 투입된 장인 1,000여명에게 주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모두 죽여 입을 막았다. 전설은 진시황을 거쳐 초패왕의 관심을 촉발했다. 삼국시대 손권도 병사를 이끌고 와서 묘혈을 찾았다. 줄지어 찾아온 시인과 명필이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못의 길이는 약 45m다. 바위에 너도나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만, 왕희지를 넘을 수는 없다. 동진의 서예가로 서성(書聖)이니 범접하기 힘들다. 붉은빛이 천인의 피로 쓴 듯 절규가 느껴진다. 왕희지는 피로 쓰진 않았다. 바람 부는 골짜기에 구름 같은 샘물이란 의미의 풍학운천(?壑云泉)은 송나라 4대 서예가 미불의 작품이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두 대가가 붓의 경연을 선사하는 듯하다. 붉고 파랗게 덧칠하지 않았다면 밋밋할 뻔했다.
천인석에서 출구로 가는 길이다. 바닥에 시검석(??石)이 보인다. 합려는 간장과 막야 부부에게 보검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두 개의 자웅검(雌雄?)은 10대 보검이라 야사에 떠돈다. 합려가 막사검을 받고 예리한 정도를 시험하려고 칼을 휘둘렀다. 바위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간장과 막야가 온갖 노력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보검을 만든 이야기는 ‘오월춘추(?越春秋)’ 등에 전해진다. 이후 간장막야(干將莫耶)는 사자성어가 됐다. ‘보검도 사람 손길이 가야 빛이 나듯 사악한 성품도 노력을 통해 선한 마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왕을 죽인 합려는 돌을 갈라 흔적을 남겼지만, 간장과 막야는 삶의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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