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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모가 스펙인 시대…이웃이 스펙인 집

입력
2021.01.27 0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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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지난해 7월 완공된 서울 홍은동의 공동체주택 '써드플레이스2 홍은'에는 1인 가구 5세대가 모여 산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고 널찍한 마당이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지난해 7월 완공된 서울 홍은동의 공동체주택 '써드플레이스2 홍은'에는 1인 가구 5세대가 모여 산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고 널찍한 마당이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부모가 서울 사는 게 스펙이잖아요.”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자취경력 9년차 송민정(28)씨의 얘기다. 9년간 그는 안 살아본 데가 없다. 기숙사, 원룸, 고시원, 빌라, 다세대주택, 사회주택, 공유주택 등 그의 집은 손바닥 뒤집듯 자주 바뀌었다. 대부분 1년도 채 못 살고 내쫓겼다. 지난해 7월 완공된 서울 홍은동 공동체주택 ‘써드플레이스2 홍은’(연면적 350.63㎡)에 입주한 그는 9년만에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 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돈이 여의치 못해 빛이 안 들어오는 좁은 집에 많이 살았다”며 “이제야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라고 부를만한 집이 생겼다”고 말했다.

같은 층을 쓰는 두 집의 현관은 서로 살짝 비틀려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같은 층을 쓰는 두 집의 현관은 서로 살짝 비틀려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집의 1층에 있는 공용라운지는 입주자들을 함께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작은 집의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공간이다. 김주영 사진작가

집의 1층에 있는 공용라운지는 입주자들을 함께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작은 집의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공간이다. 김주영 사진작가


1인가구 다섯 집이 함께 사는 공동체주택

지상 5층의 ‘써드플레이스2 홍은’은 송민정씨 외에도 20~40대 1인가구 4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체주택이다. 서울시가 2017년 도입한 ‘서울형 공동체주택’은 공동체 해체로 인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주택제도다. 민간임대사업자가 서울시로부터 건축자금을 저리에 대출받는 대신 임대료를 주변 시세의 95%이하로 받고 의무임대기간 10년을 보장한다. ‘써드플레이스2 홍은’의 월세는 30만~40만원(보증금 4,000만~1억6,000만원)으로 주변보다 저렴하다. 입주자들은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기획하는 조건으로 입주가 가능하다. 현재 서울 시내 공동체주택 인증을 받은 곳은 17곳이다. 설계를 맡은 박창현 건축가(에이라운드건축사사무소 소장)는 “기존 집합주택은 세대와 세대들끼리 서로 소통이 없었고 단절된 삶을 살아왔다”며 “이곳은 주거를 매개로 이웃이 연결되는 삶을 구현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오래된 주택가에 스미듯 들어선 집은 입구부터 기존의 집합주택과 다르다. 한 뼘이라도 면적을 넓히려는 방식에서 벗어나 집은 이웃집보다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 옆집 담벼락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 집으로 들어간다. 건축가는 “집에 오면서 입주자들이 약간의 여유공간을 느끼고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설계했다”며 “필요에 따라 마당에서 벼룩시장 등 동네행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길 따라 들어오면 1층에는 작은 와인바가 있고, 건너편에 입주자들이 모이는 카페 같은 공용공간이 있다. 입주조건인 한 달에 한번 같이 식사하는 ‘일월일식’ 프로그램도 연다. 함께 메뉴를 정하고, 요리를 한다. 입주자들의 필요에 의해 ‘가드닝 클래스’ 등도 마련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보면서 시공간을 공유한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입주자들에겐 더욱 요긴한 공간이 됐다. 자취경력 6년차의 입주자 조유림(33)씨는 “이전에 살았던 원룸은 밤늦게 들어갈 때 내 집 문을 열기 직전까지 무섭고 불안했다”라며 “하지만 이곳은 큰길과 가까운 주택가인데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치 나를 기다려주듯 1층 공용공간과 와인바에 따뜻한 불빛이 켜져 있어 안도감이 절로 든다”고 했다.

공용공간인 복도에는 둥글게 튀어나온 테라스가 있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공용공간인 복도에는 둥글게 튀어나온 테라스가 있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폭이 넓은 계단과 둥근 복도는 산책하듯 집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폭이 넓은 계단과 둥근 복도는 산책하듯 집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둥근 복도와 전면 창이 있는 집

커다란 목재문을 밀고 위로 올라가면 주거공간이다. 2층과 3층에는 두 채가 있고, 복층으로 이뤄진 4층은 독채로 구성됐다. 각자의 집으로 가는 계단과 복도도 기존의 집합주택의 그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폭 넓은 계단과 둥글둥글한 복도가 집 구석구석으로 연결된다. 덩굴 같은 계단과 복도 사이사이 집이 열매처럼 달려 있는 것 같다. 바닥엔 모래를 깐 듯한 재질의 마감재를 썼다. 외부로 뚫린 복도에는 둥근 테라스가 달려 있다. 빛과 공기, 소리와 시선이 수시로 오간다.

같은 층을 쓰는 두 집의 현관은 서로 마주하거나 나란하지 않다. 살짝 틀어져 있어 마치 단독 주택 같다. 현관문도 보통의 작은 철문이 아닌 나무로 크게 만들었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에는 야외 테이블과 의자, 화단 등 넉넉한 여유공간이 있다. 꼭대기로 오르면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있고, 꽤 넓은 텃밭도 마련돼 있다. 2,3층 입주자들이 4층까지 올라와 교류할 수 있게 일부러 꼭대기에 여유공간을 뒀다. 건축가는 “공용공간의 질이 각 세대 내부만큼이나 좋도록 배려했다”라며 “다만 공간의 용도를 정해두기 보다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할 수 있도록 비워뒀다”고 말했다.

프로그램 참여에서부터 주택관리까지, 다섯 명이 의견을 한데로 모으는 일이 번거롭진 않을까. 입주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유림씨는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사는 일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라며 “무얼 먹을지, 무슨 꽃을 심을지, 복도를 어떻게 관리할지 등을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서로 택배를 받아주고, 귀갓길을 걱정해준다. ‘서울 부모 스펙’은 없지만 ‘이웃 스펙’을 갖춘 셈이다.

3층에 있는 집에서는 정다운 주택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면 창이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3층에 있는 집에서는 정다운 주택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면 창이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2층에 있는 집은 아치형 가벽으로 공간을 구획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2층에 있는 집은 아치형 가벽으로 공간을 구획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획일적인 구조의 일반의 집합주택과 달리 집마다 위치에 따라 크기, 내부구성, 천장고 등이 모두 다르다. 건축가는 “공간의 효율성보다 각 공간에서 쾌적한 주거를 할 수 있게 창을 내고, 구성을 달리했다”라며 “1인 가구도 집을 선택할 때 가격 외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유림씨는 침실과 화장실 등 내부 공간이 어느 정도 구획돼 있고 전면 창이 있는 2층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큰 창이 있는 원룸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해봤다”라며 “화장실이나 침대가 훤히 보이는 집에서 밥을 먹는 일도 힘들어 공간이 구획된 집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아치형 가벽으로 침실이 분리돼 있다. 송민정씨는 크기는 조금 더 작지만 천장이 높고, 침대 옆으로 창을 내 주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3층을 선택했다. 송씨는 “햇살이 있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어서 좋다”며 “작지만 공간이 구획돼 있고, 천장이 높아 전혀 답답하지 않다”고 말했다.

집의 배치에 따라 내부 구성과 면적이 모두 다르다. 그 덕에 각 집에서 보이는 풍경도 제각각이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집의 배치에 따라 내부 구성과 면적이 모두 다르다. 그 덕에 각 집에서 보이는 풍경도 제각각이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복층인 4층은 독채지만 텃밭과 여유공간이 있어 2,3층 입주자들이 종종 올라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복층인 4층은 독채지만 텃밭과 여유공간이 있어 2,3층 입주자들이 종종 올라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김주영 사진작가 제공

집이 달라지니 삶도 달라졌다. “집을 구하면, 나갈 생각부터 들었어요. 다음엔 또 어디 가서 살아야 할지 걱정과 불안이 늘 따라다녔어요. 이제는 이 집을 어떻게 꾸밀까, 이웃들과 뭘 하면 재미있을까, 커피를 1층에서 마실까, 여기서 마실까 이런 소소한 고민들로 가득 찬 일상을 보내게 됐어요.”(조유림) “자취하고 처음으로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게 됐어요.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게 훨씬 좋아요.”(송민정)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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