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고먼, 그리고 장혜영...'존엄의 정치'를 말하다

입력
2021.01.27 12:00
바이든시대, 통합을 향한 첫걸음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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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다 고먼이 20일(현지시간) 미 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제46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 앞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있다. 그는 자작시 ‘우리가 오르는 언덕’에서 미국의 통합과 치유, 희망을 노래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우리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성장했고, 상처받는 동안에도 희망을 가졌으며, 지쳐있을 때도 영원히 함께 연결되어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세계가 인정하게 합시다.”

-바이든 취임식에서 아만다 고먼 시인

부서져 열리는 인간의 존엄에서 진정한 통합은 시작된다

바이든의 미국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긴 민주당 강령을 검색하는 걸 당장 중단하는 게 낫겠다. 차라리 나 같으면 아만다 고먼의 짧은 시를 선택하겠다. 바이든 취임식에서 축사를 낭독하여 화제가 된 22세의 흑인 계관시인 말이다. 그녀는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이란 시에서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는 민주주의의 힘을 노래했다.

부서진 마음이라? 이는 파커 파머라는 영성 운동가의 표현이다. 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은 마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은 우리의 모든 앎의 방식이 수렴되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사실 트럼프의 등장은 이미 산산이 부서진 마음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리버럴들은 그저 트럼프 지지자들을 경멸하고 저주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난 수십 년간의 워싱턴은 그저 가진 자들의 '왕좌의 게임'일 뿐,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오직 자신의 삐뚤어진 자아와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에만 바빴던 트럼프는 이들의 분노하는 마음에 성냥불을 그었다.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구호는 파머에 따르면 인간 영성의 악의적인 활용에 다름 아니다. 영성이란 인간이 더 위대한 것과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트럼프는 이 인간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갈망을 적대적 분열의 정치와 백인 우월주의 폭력으로 이끌었다.

사실 바이든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이란 비전도 단지 정책의 나침반이 아니라 위대함으로의 영성적 호소이다. 그는 캠페인 기간 내내 미국의 영혼을 회복하자고 절실히 호소했다. 당시 민주당 전략가들 사이에서는 의료보험처럼 구체적인 이슈를 내걸지 왜 그런 추상적인 힐링에 집착하는가라며 냉소적 태도가 많았다. 하지만 바이든은 미국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서는 부서진 마음에 가만히 다가가야 함을 알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치유해야 할 것이 많다” 고 지적했다. 시는 바디유가 말하듯이 진리를 생산하는 사건에 대한 언어이다. 고먼 시인은 트럼프가 가고 바이든 시대가 도래함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함께하기보다 나라를 파괴하는 힘을 봤다.” 하지만 “우리는 무서웠던 시기에도 새로운 챕터를 쓰기위해, 희망과 웃음을 되찾기 위한 힘을 발견했다.” 부서진 틈새로 다시 열리는 비통한 마음의 민주주의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미 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부인 질 바이든 여사, 아들 헌터 바이든, 딸 애슐리 바이든과 포옹하고 있다. 워싱턴=AP뉴시스

산산이 조각난 고통 속에서도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는데 바이든과 고먼보다 더 적절한 이가 있을까? 나는 취임식에서 바이든이 “어떤 운명이 당신에게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할 때 오래 전 그의 사랑하는 가족의 교통사고가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바이든은 가장 행복했던 정점인 최연소 상원의원 당선과 강력한 권능의 부통령 시절,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아니 그의 그간 삶 자체가 소위 그들이 정해 놓은 ‘정상’을 향한 고통스러운 훈련의 연속이었다. 말을 더듬는 바이든은 평생 놀림과 조롱하는 시선에 흔들려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 개체의 고유의 존엄과 동등함을 말하며 당당하게 격려하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일으켜세웠다. 고먼 또한 바이든 처럼 어린 시절 말을 더듬고 심지어 청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바이든과 고먼은 이 소위 ‘정상인’의 가장자리에서 오히려 모든 인간의 취약함과 존귀함이라는 통찰을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더 나은 민주주의란 단지 외부의 목표가 아니라 ‘진리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적 각성과 함께 간다는 걸 바이든과 고먼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이든과 고먼의 공화주의적 힐링을 통한 통합

훼손된 마음을 다시 더 온전하게 통합하는 넓은 수원지는 어디일까? 바이든과 고먼은 이를 건국의 시조와 이후 링컨으로 이어지는 ‘공화주의적 자유주의’ 가치에서 찾는다. 바이든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적 이상과 인종주의, 토착주의, 공포와 (타자에 대한) 악마화가 오랫동안 우리를 갈라놓은 가혹하고 추악한 현실 사이에서 부단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는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식 문구를 인용하며 미국을 통합하는 일, 바로 “그곳에 나의 모든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먼은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처음으로 혁명을 이끌었던 바람 부는 북동부”를 비롯한 모든 곳곳에서 일어설 것이라고 선언한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송한 22세 아프리계 여성 아만다 고먼은 16세이던 2014년 LA 청년 계관시인이 됐고 2017년 미국 최초로 전국 '청년 계관시인'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하버드대(사회학)를 졸업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바이든과 고먼의 이 공화주의적 통합은 그저 공동체의 묻지 마 통합, 가짜 평화의 통합이 아니다. 바이든은 수세기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며 “사랑해야 할 공통의 목표” 속에서의 통합임을 분명히 한다. 바이든은 이를 “기회, 안전, 자유, 존엄, 존중, 명예, 그리고 진실”이라 규정한다.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한 ‘사랑싸움’을 통한 더 나은 공화국으로의 ‘갈등적 합의’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자녀들을 위한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바이든에서 고먼으로 이어지는 미래로의 통합이다. 어떤 운명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지만 동등한 시민의 공화국을 만들어 가는 한 우리는 함께 불운을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바이든은 오늘날 통합이 증오와 폭력 등 우리가 직면하는 “공통의 적”과 싸워야 하는 험난한 길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통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환상처럼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사실 나는 토크빌이 격찬했던 다원적 가치의 미국과 헌팅턴이 저주를 퍼부은 문명의 충돌의 미국이 과연 공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민주당 바이든 및 공화당 존 케이식(전 오하이오 주지사)과 정치를 그저 야바위 게임으로만 생각하는 상원의 미치 맥코넬 일당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타협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바이든과 고먼은 미국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바이든은 “역사, 믿음, 이성”을 “통합의 길”로의 희미한 등대 삼아 폭풍우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담담하게 제안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내 모든 영혼을 담아 미국을 통합시키겠다”며 화합과 단결을 호소했다. 워싱턴=AP뉴시스


바이든과 고먼에서 장혜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대한민국도 어떤 의미에서는 토크빌과 헌팅턴이 공존할 수 없는 두 국가의 세상으로 진입했다. 대한민국 모든 이들의 마음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 놀랍게도 뜻하지 않은 사건에서 통합의 가능성이 시작된 걸 보았다. 우리 모두를 비통함에 빠뜨린 장혜영 의원의 고통과 슬픔 말이다.

마치 바이든이 비통한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자고 하듯이 장혜영 의원은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하지만 장 의원은 비록 부서진 마음속에서도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가고 있다. 슬픔 속에서 그녀는 성장하고 우리도 성장 중이다. 통합이란 그저 봉합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훼손되어 가는 존엄과 진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치유해 나가는 미래로의 과정이 아닐까? 어쩌면 그간 우리는 그저 게임으로서 정치를 접할 뿐 공화주의 정치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데서 지금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25일 김종철 대표로부터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고 사실 공개는 인간 존엄을 회복하는 길이라며 연대를 호소했다. 사진은 지난 4일 당대표단회의에 참석한 장 의원과 김 대표. 뉴시스

바이든의 발걸음을 그저 취임식 특유의 수사적 호소라고 치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냉소적 정치관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바이든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습니다”라고 믿음을 피력한다. 고먼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 시민들이 (비록) 부상을 당한 상태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라고 확신한다. 마치 바이든과 고먼의 믿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장혜영은 답한다.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동료 시민들의 훼손된 존엄을 지키는 길에 함께 해주십시오.” 이제 ‘비통한 자’들의 존엄의 정치, 공화주의적 통합의 정치가 열렸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미국 정치 전문가다. 서강대에서 사회학, 서울대에서 정치학(석사)을 공부하고, 미국 뉴스쿨대에서 레이건과 클린턴 대통령제를 비교한 박사 논문으로 한나 아렌트 상을 받았다. 저서로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예정된 위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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