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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살 계관시인이 노래한 미래와 희망

입력
2021.01.26 00:00
27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송하는 어맨다 고먼. AP 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송하는 어맨다 고먼. AP 뉴시스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대통령 취임식이 공허한 의전이 아니라 최고 정치적 권위의 신성하고 엄숙한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시민종교'의 중요한 의식이라고 했다. 벨라가 루소에게서 빌려온 시민종교라는 개념은 정치공동체로서 미국의 존재에 의미와 목표를 제공하고 미국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신념체계, 상징, 그리고 의례의 총체를 의미한다. 벨라의 시민종교론은 민족주의적인 자기 숭배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가 이야기한 시민종교는 미국사회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정의, 인간의 존엄성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라는 현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를 설정해 주는 윤리적 원칙과 이상을 의미한다.

여느 종교처럼 미국 시민종교의 이러한 원칙과 이상은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말씀은 미국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 '예언자'와 '사제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고, 독립기념일, 현충일, 취임식 등의 주기적 의례를 통해 미국인들의 일상에 각인되어 왔다.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링컨 기념관 연설 등이 미국사회의 중요한 고비에 정치인과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그 이상과 신념체계를 재확인하고 재해석해 사회통합을 도모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 좋은 예라고 하겠다.

지난 4년간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서 뱉어 내는 혐오와 분열의 언어와 그 언어로 동원된 인종적 민족주의의 분노와 폭력이 미국 시민종교의 근간을 뒤흔들고 급기야 민주주의의 성전인 의사당 건물을 유린하고 짓밟은 끝에 열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은 그래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이 시민종교의 성스러운 의식이 지금 미국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에서 시민종교의 이상과 원칙을 감동의 수사로 다시 새기고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는 예언자로 떠오른 사람은 뜻밖에 바이든 대통령이 아니라 취임 축시를 낭송한 22세 흑인 여성 계관시인 어맨다 고먼이었다. '우리가 오르는 언덕'이라는 축시에서 고먼은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이 회복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이며, 그 미래는 모든 문화, 피부색, 품성, 조건의 사람들을 위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회이고, 그 이상은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짓는 모든 다리들'에서 만들어진다고 노래한다. 아직 앳된 소녀의 얼굴을 한 이 젊은 시인은 분열의 언어와 폭력으로 타락한 민주주의의 성전을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정화하고 정의로운 다인종 민주주의로서의 미국사회의 담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권력이 부패할 때 시가 그것을 정화한다."

이를 두고 그저 공허한 의식과 말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국 시민종교의 역사는 언어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4년 43세 무명의 정치 신예 오바마를 하루 아침에 차기 대통령후보로 만든 것도 미국사회의 이상과 이념을 재해석해 새로운 비전을 보여 준 그의 연설이었다. 그것이 언어의 힘이다. 사회학자의 머리로 바라보는 미국사회의 위기는 여전히 너무 깊고 어둡지만, 사회학을 전공한 젊은 시인이 낭랑한 목소리와 우아한 손짓으로 축시를 낭송하는 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미국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럽게 희망을 가져본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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