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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열리니 600년 잠든 도시들이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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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도시의 번성을 이끄는 가장 핵심적 요소가 있다면 바로 물이다. 인류의 4대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황하, 나일 문명 모두 강줄기를 따라 태동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길이다. 그 옛날 실크로드처럼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수송이 쉬운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이 그렇다.
사람이 모이고 번성하는 곳은 자연 조건과 더불어 경제적 가치의 창출이 따라붙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도시는 자연 조건을 넘어선 도시들, 이를테면 두바이의 탄생은 예외적이다. 그러나 두바이의 경우 경제적 가치를 만들기 위해 하늘길을 여는 공항을 건설하고 물류의 수송이 쉽도록 하는 항만을 거점화했다.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진 않았지만 하늘과 바다의 길을 만듦으로써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해서 가치를 만든 것이다. 경제 번영을 위한 도시 간의 경쟁은 물과 길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다.
도로나 다리를 놓거나, 터널을 뚫는 것처럼 없는 길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길은 번영을 가져올 유일한 열쇠는 아니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임엔 틀림이 없다. 도시로 사람과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 세계 도시들의 치열한 수 싸움은 이렇듯 길을 통해 진행 중이다.
실크로드라고 불리며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된 사마르칸트도 길에 의해 번성한 도시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타슈켄트 다음으로 큰 제 2의 도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은 역사 속에 묻힌 상태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7세기에 건설되어 15세기까지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번영을 누렸다. 동서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도시였던 만큼 문화와 경제를 꽃피웠던 실크로드의 대표 도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원전 329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해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문화가 융합되며 헬레니즘 문화가 융성했다. 712년에는 아랍의 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 당했고, 이후에도 아랍 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미술 등 예술이 크게 발전한다.
여러 풍파 속에서도 길의 힘 때문에 상업 도시로서 명성을 쌓아나가던 사마르칸트는 1220년 복수를 위해 공격해 온 칭기즈칸에 점령을 당한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명성은 잊혀 가는 듯했으나 14세기 후반에 등장한 티무르 왕조는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건축물과 찬란한 문화는 사실상 티무르 제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으며,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대표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도시는 길에 의해 흥망성쇠의 중심에 서게 된다. 14·15세기에 최고의 도시로 번영을 누린 사마르칸트는 당시 두번째 동방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후 쇠퇴한다.
티무르 제국의 멸망과 함께 해양 제국들이 등장하면서 바닷길이 열리며 주요 교역로를 대체하게 된 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과거의 명성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고, 국가와 국가 사이의 역학 구도와 지정학적 요인, 독재와 쇄국 정책 같은 정치적 요인 등으로 이제는 역사 속 도시로만 남게 됐다.
특히 소련 해체 이후 독립된 우즈베키스탄을 이끈 카리모프 대통령은 25년의 철권 통치 기간 동안 국경을 걸어 잠그고 부정부패, 안디잔 학살, 언론 통제, 부정선거 등의 풍파를 남겼고, 2016년 9월 뇌출혈로 사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사마르칸트에 묻혔다.
주목할 것은 이후 정권을 잡은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에 의해 그동안 닫혀있던 국경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통일하고, 거대 제국으로 활약했던 티무르 제국의 후예. 장장 600년 동안 잠을 자다 깨어나는 우즈베키스탄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카자흐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에 갔던 2018년 5월은 덥다는 표현보다는 뜨거웠다는 말이 어울렸다. 카자흐스탄 최남단 사라가쉬(Saryagash)에서 국경을 넘는 데는 30분도 안 걸렸다.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담당하는 세관 직원들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환영 인사를 했다.
국경에서 흙길과 아스팔트가 섞여 있는 오묘한 도로를 빠져 나와 타슈켄트 시내까지 이동하는 20~30분 동안 달리는 차들이 온통 쉐보레(대우)였다. 택시, 미니버스(다마스), 큰 버스 모두 낯 익은 브랜드 대우의 다마스, 마티즈, 스파크였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택시는 4명이 다 타야 하고 가장 비싸지만, 그마저 우리 돈으로 1,000원이 안 된다. 내가 탄 다마스는 8인승이었는데, 요금은 2,000숨 당시 우리 돈 270원에 불과했다. 8명을 꽉 채운 다마스는 승객들을 타슈켄트 옛 시가지에 있는 초르수 바자르(Chorsu Bazaar)로 데려다 주었다.
대우자동차(지금의 GM)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한 이래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유지해오고 있다. 가끔 다른 자동차 브랜드 차량도 보였지만 눈을 씻고 찾아야 1,2대 정도였다.
전임 대통령 시절이었던 2010년 GM 차량을 뺀 다른 나라 자동차 회사에 세금을 매기겠다는 방침으로 해외 브랜드 차량은 이웃나라 카자흐스탄으로 대거 쫓겨났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우즈베키스탄의 평균 국민 소득은 2,000달러가 안 된다. 소득 수준이 낮으니 경차를 주로 구매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승차 공유 플랫폼인 얀덱스(YANDEX)에 등록해 택시 운전을 한다.
지나다가 만난 티코가 참 반가웠다. 택시비는 저렴하다. 도심을 끝에서 끝까지 가도 우리 돈 2,000원이면 가능하기에 어렵사리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 타지 않아도 된다. 물론 등록하지 않고 영업하는 불법 택시를 이용하면 더욱 저렴하게 이용이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무엇보다 깜짝 놀란 것은 환율이다. 국경의 환전소에서 50달러를 환전한 나는 돈뭉치를 받아들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돈다발의 가치는 작았지만, 마치 엄청나게 큰 돈을 받아든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물론 이 돈은 나흘 동안 숙박비, 교통비, 식사비로 충분했지만, 돈을 낼 때는 뭉텅이 지폐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우즈베키스탄의 환율 시장이 통계로 잡히는 공식 환율과 암 달러상이 주도하는 시장 환율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은 그 격차가 두배에 달했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이를테면 공식 환율은 1달러에 4,000숨이었다면 암 달러상과의 거래 때는 8,000숨을 받을 수 있었다.
이중 환율이 지배하고 있던 우즈베키스탄의 경제는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2017년 9월 환율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암 달러상이 주도하는 시장 환율이 더 좋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장으로 들어가는 외화를 시장이 아닌 은행으로 되돌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개혁 조치는 1달러에 4,000숨이었던 공식 환율을 없애고, 시장 환율이었던 8,000숨으로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 결과 화폐 가치가 내려갔고 기업 가치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물가 상승률은 2016년 5.6%에서 2017년 14.4%로 3배 가까이 뛰었다.
반면 일하고 받는 급여의 가치는 반으로 폭락했다. 기업들은 수입하는 물자 대금을 이전보다 두 배의 가격으로 치러야 했다. 이는 수출 기업들에겐 기회였지만, 기본적으로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우즈베키스탄의 상황에서는 이 마저도 상쇄되는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나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들른 마트에서 환율의 실상을 생생히 봤다. 사람들이 장을 보기 위해 현금 다발을 종이 가방에 가득 담아 왔고, 이 돈다발은 장바구니를 채운 내용물과 교환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 중엔, 냉장고를 사기 위해 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돈을 가득 채워 넣고 가서 값을 치른 사례도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환율 단일화와 함께 취한 개혁 조치는 하나 더 있다. 외국 기업들에 대한 각종 규제 요소를 없앤 것이다.
대표적으로 환전과 송금 문제의 어려움을 풀어줬다. 2017년 9월 외환 자유화의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환전과 해외 송금에 대한 제한이 많아 기업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외 과실 송금 제한을 폐지하는 동시에 2년 동안 세무조사 유예, 국제 입찰 수주에 대한 절차를 간소화하는 조치들이 잇따르면서 해외 자본의 투자가 늘기 시작했다.
유럽은행에 따르면 2016년까지 전무했던 대 우즈베키스탄 투자가 2017년 6,900만 유로를 시작으로 2018년엔 3억 9,700만 유로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산업특구 9개, 의약품 특구 7개, 농업특구 2개, 관광특구 1개를 지정, 총 19개의 산업 특구를 운영했는데, 투자 금액에 따른 토지세, 소득세, 사회보장세 등을 감면하는 등 세금 혜택을 줬다.
우즈베키스탄은 현재 섬유, 농업, IT, 자동차, 보건 의료 분야를 집중 육성하고자 관련 정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경제 정책의 개방과 함께 국경을 열면서 관광 산업의 활성화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정책은 기존 '선(先) 비자 후(後) 방문' 정책을 없애고 무비자 관광 입국을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8년 2월 한국, 터키, 일본 등 7개 국을 시작으로, 2019년 2월엔 호주와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 45개국으로 대상을 확대해 총 64개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밖에도 미국, 베트남, 인도 등 전자 입국 비자를 발급하는 등 비자 발급을 간소화했다.
'관광 발전 구상 2019~2025'라는 이름의 정책은 대통령 령에 종합적으로 담겨있다. 2017년 관광 산업의 비중이 2.3%였던 우즈베키스탄은 이를 5%까지로 확대하고, 숙박 시설과 교통망을 재정비하는 등 지원 대책도 추진하고 있다.
호텔 3등급엔 객실 당 약 4,000만 숨(4,800달러), 4등급엔 6,500만 숨(7,800달러)을 지원해서 2021년까지 약 1,500개 이상의 호텔을 짓는 것이 목표다. 아울러 국내 교통 티켓을 온라인에서 예약할 수 있는 교통 시스템 통합 전자 포털을 구축하는 등 2017년 250만을 기록한 관광객 수를 2025년까지 900만 명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이다.
600년 넘게 잠자던 우즈베키스탄이 깨어나면서 뜻밖의 길목 특수를 누리는 도시도 생기고 있다. 바로 이웃나라 카자흐스탄의 남부 도시 쉼켄트다. 쉼켄트는 알마티, 아스타나에 이은 제 3의 도시로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와 불과 120㎞ 떨어져 있다.
이곳은 2011년 63만 명이었던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최근 100만 명을 넘어섰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2019년 7월 쉼켄트 시 개발을 위한 포괄적 계획을 세우면서 쉼켄트~타슈켄트를 잇는 A2 고속도로를 재정비하면서 21㎞의 구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포함시켰다.
분야 별로 진행되는 이 계획은 2023년까지 89개 프로젝트에 32억 달러를 투자한다. 2만794개의 아파트와 319개의 복합주거 단지 건설, 2,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 15개 신설, 스포츠 경기장 재건축 등을 통해 2018년 52억6,000만 달러였던 쉼켄트시 생산 규모를 2023년까지 92억1,000만 달러로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쉼켄트에서 봉고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넘게 달리면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라가쉬라고 하는 작은 시골 도시가 나온다.
카자흐스탄의 구석에 있던 사라가쉬는 최근 들썩이고 있다. 오랜 기간 쇄국 정책을 펴던 우즈베키스탄이 개방화로 방향을 틀면서 그동안 벽으로 존재했던 공간이 문으로 바뀐 것이다.
사라가쉬는 더 이상 카자흐스탄의 구석이 아닌, 두 나라의 가운데 있는 중요한 곳으로 그 위상이 바뀌고 있었다. 길이 뚫리자 가장 먼저 활발해 지는 건 역시 시장이다. 카자흐스탄 쪽 국경 바로 앞 볼품없는 시장은 컨테이너 상점이 대거 들어서며 탈바꿈했다.
시장 이름은 '유라시아 훌세일 바자르(ЕВРАЗИЯ ОПТОВЫЙ БАЗАР)'로 우리말로 하면 유라시아 전 품목 판매 시장이다. 얼마 전까지 1층짜리 컨테이너 상점들만 있었지만 지금은 2층까지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시장 면적도 넓어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만드는 선풍기, 냉장고, 텔레비전 등 공산품들이 국경을 넘어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하고, 우즈베키스탄의 농산물이 길을 통해 카자흐스탄으로, 또 길을 넘어 러시아까지 가고 있다. 길이 열리면서 만나게 된 풍경이다. 국경 지역 시장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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