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어울리는 음악'을 추천해달라는 학생의 메일을 받았다. 여느 때 같았더라면 드뷔시의 '눈 위의 발자국'이나 슈베르트의 '얼어붙은 눈물'처럼 음악적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곡들을 읊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과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종강시간, 열에 들떠 성토했던 죄책감을 음악으로 부연하고 싶었다. 종강의 주제는 지난 칼럼에서도 다뤘던 '기후위기를 일깨운 음악'이었다. 강의를 진행하는 내내 면목이 없었다. 청년세대는 기후위기를 일상으로 안고 살며 망가진 지구를 물려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학생에게 답장을 보내며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빙하를 지키는 얼음의 음악'
이탈리아의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는 북극해를 떠다니는 유빙 한 가운데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건반악기 특유의 맑고 투명한 음색은 얼음 빛을 투영하며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빙하와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북극을 위한 엘레지'란 제목에 걸맞게 진지하고 명상적인 악상은 북극의 자연이 자아내는 음향, 이를테면 물새소리, 매서운 삭풍의 사운드, 뱃머리에 부딪혀 삐걱거리는 얼음소리 등을 애틋하게 품어낸다. 곡의 절정은 빙벽이 녹아내리는 무시무시한 굉음을 확성 시키면서 '북극을 구하자'는 연주자의 메시지를 뚜렷이 드러낸다.
'북극을 위한 엘레지(Elegy for the Arctic)'가 연주된 곳은 노르웨이의 북극점 중간에 자리 잡은 스발바르의 빙하였다. 에이나우디는 이 곡을 통해 북극의 소중함을 각성시키려 했다. 지구 전체의 기후를 조절하고 해류를 순환시키는 북극의 빙하는 전 지구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는다. 하지만 기록적인 속도로 녹아내리는 빙하와 만년설은 지구 온난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 중 하나일 것이다. 이상고온으로 북극해의 얼음이 해빙되면서 햇빛에 노출되는 바다의 면적이 심각히 늘어나 버렸다. 바다가 더 많은 햇빛을 흡수하자 해수의 온도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이는 결국 바다의 얼음을 다시 녹이는 악순환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얼어붙은 방패를 잃어버린 북극해는 어선들의 무모한 남획과 석유시추선의 습격으로 처절히 파괴되고 있다.
스발바르 빙하에서 멀지않은 노르웨이의 또 다른 지역에선 해마다 얼음 음악축제(Ice Music Festival Norway)가 열린다. 만년설과 빙하를 지키기 위해 의기투합한 괴짜 음악가들은 얼음으로 악기를 직접 제작한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서 캐어 올린 거대한 야생 얼음 덩어리는 악기의 울림통으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된다. 자칫 부서지기 쉽고 금세 녹아버리는 얼음의 속성상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첼로, 하프 등의 현악기나 트럼펫, 호른, 색소폰 등의 관악기를 비롯해 드럼, 마림바 등의 타악기까지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해왔다. 나무나 금속악기의 울림에만 익숙하던 음악가들은 얼음이 가진 자연음향의 속성, 투명하고 청량한 특유의 사운드에 매료되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얼음 사운드의 품질이 온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얼음악기가 가장 좋은 소리를 발성하려면 영하 12도가 필요하다. 온도에 맞물려 변화무쌍한 차이를 보여주는 사운드 덕택에 축제의 모든 콘서트는 유일무이한 즉흥연주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북극의 이상고온이 지속된다면 얼음악기의 소리도, 얼음음악 축제도 뜨거운 해수면으로 용해되고 말 것이다. 얼음이 들려주는 명징한 청각적 경험은 그만큼 추운 날씨여야 가능하다. 겨울에 어울리는 음악을 추천해달라는 학생에게 북극을 지키는 음악으로 이렇듯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과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음악도 힘을 내어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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