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말을 더듬는 건 자연스러운거야, 흘러가는 강물처럼"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어린이 책은 결코 유치하지 않습니다. ‘꿈꿔본다, 어린이’는 아이만큼이나 어른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어린이 책을 소개합니다. 미디어리터러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우리 반이었던 A는 말이 없는 어린이였다. 말은 물론, 글도 그림도 종이접기도 가위질도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표정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 가끔 몸싸움을 하는 것 말고는 A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미셸 오슬로의 그림자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드 프린세스'를 감상하고, 그림자 연극을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A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기쁜 표정으로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셀로판지와 종이를 오려서 배경과 인형을 만들고, 그림자 연극 공연을 했다. 아주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A는 웃었다. 과연 무엇이 무기력한 A를 세상과 소통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A에게 열린 언어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나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과 발견의 순간 중의 하나였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캐나다의 시인이며, 말을 더듬는 조던 스콧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드니 스미스가 그린 그림책이다. 작가들은 말을 더듬는 어린이가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아를 찾아갔던 강렬한 삶의 순간을 이미지의 언어로 담아내었다. 스콧은 어린 시절 입 속에서 맴돌았던 말과 교실에서의 소외감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방 창 너머로 보이는 소나무의 스-.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은 까마귀의 끄-. 아침 하늘에서 희미해져 가는 달의 드-” 어린이는 아침마다 목구멍에 달라붙은 낱말들의 소리와 함께 깨어나고, 그것을 입 밖으로 옮길 수 없기에 돌멩이처럼 침묵한다. 말을 통해 소통하는 교실에서의 시간들은 말을 더듬는 어린이에겐 고통의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가 입을 열 때 스며 나오는 달빛을 보지 않아요” 학급의 아이들은 ‘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겁을 먹어 일그러지는 얼굴을 비웃을 뿐이다. 말을 더듬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힘들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이를 조용한 강으로 데려간다. 일그러지고 뿌옇게 흐려지는 세계를 떠나 비로소 풍경에 초점이 맞춰지고 잔잔한 자연 안에서 비로소 평화의 감각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슬퍼하는 아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면서 말한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그리고 독자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보며 책장을 넓게 열어젖혀 물거품이 일고, 굽이치다가, 소용돌이 치고, 부딪치면서, 그러나 아름답게 햇빛에 일렁이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의 아름다움을 목도하고, 햇빛이 부서지는 강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소년은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강은 더듬거리며 흘러간다. 그러나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마치 강물처럼. 밝게 빛나는 이 순간은 어린이가 언어 장애를 극복하여 유창하게 말하게 되는 순간이 아니다. 조던 스콧은 지금도 여전히 말을 더듬는다. 이 순간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자신의 언어를 마치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긍정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강렬한 미적 체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언어 장애를 겪는 당사자의 감각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그림책이라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소년이 교실에서 말하기를 요구받았을 때, 짧은 순간이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곤경의 시간은 작은 프레임으로 쪼개져 시시각각 일그러지는 아이의 얼굴로 그려진다. 아이가 여러 사람의 주목 속에서 곤란함을 느낄 때,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는 희끄무리하게 뭉개진다. 그러나 아빠와 함께 자연을 걸을 때, 아이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때, 풍경은 그 어느때보다 선명하고 잔잔하다.
소년이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할 때, 독자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며 책장을 열어젖혀 힘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태양 아래에서 반짝이는 강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동기화 시키고 정서적, 감각적으로 연결하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한 예술적인 체험이다.
책은 어린이 뿐 아니라 내가 자연스럽지 못하며,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며, 세계로부터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치유의 감동을 제공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지난한 노동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발견으로부터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또한 그렇게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작품이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