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토요일 격주로 식재료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몰랐던, 식재료를 제대로 대하는 법을 통해 음식의 기본을 이야기합니다.
화요일 오전, 연재 원고 마감을 위해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문자를 하나 받았다. 근 10년 가까이 고구마를 사먹고 있는 전남의 농가였다. 어디냐고? 물론 말할 수 없다. 매체에 글을 쓰면서 가끔 정보 제공 차원에서 특정 상표 제품이나 구입처에 대해 언급할 때가 있다. 요청에 응한 것뿐인데 어김없이 ‘광고다’라는 덧글이 달린다. 프리랜서 음식평론가인 나는 글의 바탕이 되는 모든 음식을 내 돈으로 사먹는데도 그런 반응이 일색이다. 따라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판매처를 특정하지 않겠다.
어쨌든, 설을 맞이해 농사짓는 작물을 선물로 보내준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열심히 사먹으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거의 매달 꾸준히 고구마를 5㎏씩 사먹으면 1년에 30만원은 족히 쓰니 적은 돈은 아니다. 덕분에 명절에 선물을 받다니. 소속이 없다 보니 프리랜서는 상여금이나 명절 선물 같은 걸 받을 일이 거의 없다. 대체로 별 느낌이 없지만 아주 가끔은 직장인의 스팸 선물 세트 같은 게 부러워질 때가 있는지라 유난히 반가웠다.
음식평론가는 정말 자질구레하게 이것저것 주워 먹어야 해서 하나의 음식 혹은 식재료를 오래 사먹는 경우가 꽤 드물다. 그런 가운데 지금 먹는 고구마는 10년 가까이 내 오븐에서 구워져 냉동고에서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발단은 어느 날 집으로 예고 없이 날아든 자색 고구마 한 상자였다. 알고 보니 아는 시인 겸 편집자가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판매처에서 꾸준히 고구마를 사먹기 시작한 가운데, 어느 날 새로운 품종의 소식을 들었다. 단맛은 밤고구마에 가깝지만 질감은 뻑뻑하지 않고 물고구마처럼 부드러운, 말하자면 양쪽의 장점을 한꺼번에 갖춘 품종이라고 했다. 바로 주문해 맛을 보고 놀랐다. 아무런 맛도 더하지 않고 그냥 굽기만 한 고구마가 독립된 디저트와 같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품종의 이름은 ‘달수’, ‘이렇게 달 수가 없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달수 고구마 원산지는 일본
그런 달수는 이제 전국 고구마 재배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전국구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 사실 고구마를 품종 이름까지 알고 사먹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여느 작물이 그렇듯 품종이 매우 다양한데다가, 고구마라면 ‘물’, ‘호박’, 밤’ 등 일반적인 명칭으로 기억 및 선택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달수는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무려 27브릭스에 이르는 당도이다. 브릭스는 당도의 단위로 물 100g을 기준으로 녹아 있는 당분의 양을 의미한다. 1브릭스면 물 100g에 당 1g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비교를 하자면 귤 가운데 당도가 높은 것이 12브릭스, 요즘 최고급 과일의 신예 선두로 꼽히는 샤인 머스캣이 최소 18브릭스이다. 달수가 이들 과일보다 1.5~2배 이상 더 달다.
그런데 달수는 고향이 어디일까? 사실 품종의 이름이 ‘진율미(실제 국산 고구마 품종 명칭)’와 같은 식이라면 크게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친근감이 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디 구황작물인 고구마의 품종 이름이 ‘달수’라니. 이건 뭔가 너무 잘 맞아 떨어져서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족보를 추적해 보았더니 나름 익숙하고도 예측 가능한 결론이 나왔다. 달수는 일본 출신의 고구마였다.
베니하루카(べにはるか). 바로 달수의 본명이다. 큐슈오키나와 농업 연구소에서 1997~2007년에 개발 및 육성한 고구마로 ‘큐슈 121호’와 ‘하루코가네’의 교배종이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아 고향세 답례품 상위권에 오르곤 한다. 국내에는 2010년쯤에 들어와 재배 및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공식적으로 품종을 반입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하필 개미바구미 등 금지해충이 서식해 외국 품종의 반입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베니하루카는 어떻게 국내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2020년 11월 15일자 일본농업신문에 달수와 베니하루카의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이 ‘고구마 베니하루카 무단유통 한국에서 확대 재배면적 40% 수출 경쟁에 우려’였다. 한국 농민이 견학에서 들여온 베니하루카가 국내에 자리 잡았다는 요지였다. 해남군농업기술센터에서 농민들의 요청으로 베니하루카를 무균 배양해 ‘해남 1호’라는 이름을 붙여 보급해왔다는 것이다. 워낙 맛이 좋다 보니 해남 고구마 생산자 협의회를 통해 해남 1호가 전국으로 퍼졌다. 달수는 이제 대세로 자리 잡았고 세를 계속 불려 나가고 있다.
베니하루카와 달수, 혹은 해남 1호의 관계가 공식적인 국제 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은 없다. 베니하루카가 신품종 보호에 관한 국제 협약(UPOV)으로 보호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품종 육성자 권리를 행사하려면 양도가 시작된 지 4년 이내에 현지에서 품종 등록을 해야 한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반출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므로 그런 절차를 거쳤을 리가 없다. 게다가 작물은 의류 같은 공산품과 또 달라 자발적으로 재배한 흐름을 막거나 돌리기도 어렵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를 수 없다. 2019년부터 벌어진 불매 운동으로 일본 태생의 의류나 일본산 맥주가 큰 영향을 받았지만 고구마는 원 품종이 일본산일 뿐 국내에서 재배했다. 게다가 수많은 식재료가 식탁을 드나드는 현실에서 일반 소비자에게 품종의 이름부터 특성을 넘어 근원까지 따지기를 바라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하지만 농업계에서는 도의나 자존심의 차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달수에 대한 농업 매체의 보도는 대부분 이런 시각이다. 하필 일본 품종이 무단 도입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탓에 질타를 받으므로 망신살이 뻗친다는 논리이다. 이런 가운데 국산 고구마가 딱히 손을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농촌진흥청이 기능성과 재배 안정성이 우수한 품종을 지속적으로 개발 및 보급하고 있다. 그 결과 국산 품종의 재배 면적 점유율이 2016년 15.9%에서 2020년에는 37.1%로 2.5배 가량 높아졌으며, 2024년에는 40%를 목표로 잡고 움직이고 있다. 높은 베타카로틴 함유량이나 많은 수확량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국산 고구마의 대표 품종은 호감미, 풍원미, 진율미 등이다.
12~16℃에 두고, 구울 때는 57~75℃
품종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로 들어왔든, 일단 우리집 현관으로 굴러 들어온 고구마는 잘 먹는 게 예의이다. 앞에서 매달 고구마를 5㎏ 정도 들여 놓는다고 했다. 날것으로는 물론 익힌 뒤에도 저장성이 나쁘지 않은 작물이 고구마이다. 따라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사는 것보다 아예 정기적으로 대량을 사서 한꺼번에 조리하는 게 훨씬 편하다. 사실 고구마는 의외로 조리 후보다 전의 보관이 훨씬 더 어렵다. 구황작물이니 거칠게 굴려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고구마는 아열대인 남미와 중미가 고향이다. 최상의 보관 온도대가 12~16℃이므로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하다 못해 여름은 불타 오르고 겨울은 꽁꽁 얼어 붙는 나라에서는 보관이 특히 어렵다. 냉장고에 넣어도 상하고 온도가 높은 곳에 그대로 두면 곳 멍이 든 곳부터 썩어버린다. 따라서 상자로 구매했다면 받자마자 뒤집어 개봉해 온도대가 맞는 곳에서 일단 통풍을 시킨다. 오래 두고 먹을 요량이라면 신문지로 한 개씩 싸고, 조리 직전까지는 물을 대지 않는다.
이처럼 살펴보니 은근히 까다로워 보인다면 환경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빨리 조리해 버리는 게 몇 배는 속이 편하다. 달수든 아니든, 과연 고구마는 어떻게 조리해야 잠재력 즉 단맛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길거리의 군고구마 장수를 떠올리기 쉽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일종의 오븐으로 굽는 고구마 말이다. 냄새도 정취도 매우 훌륭한 가운데, 이런 드럼통 오븐식의 조리법은 고구마에게 최선이 아니다. 장작불은 최대 600℃까지 올라가며 복사열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고구마가 맛의 멍석을 깔기도 전에 얼른 재주를 부리라고 몰아붙일 것이다. 그렇게 주눅이 든 고구마는 차선으로 익어버린다.
미국국립생물센터(NCBI)의 논문에 의하면 익히지 않은 고구마는 자당, 포도당, 과당을 함유하고 있지만 대체로 썩 달지 않다. 하지만 익히기 시작하면 전분이 가수분해되어 맥아당으로 바뀐다. 품종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고구마를 익히면 맥아당의 비율이 최소 50%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단맛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 준다. 따라서 고구마가 맥아당을 최대한 발달시킬 수 있는 온도에서 구워야 제 맛이 날 텐데, 관건은 온도이다. 고구마의 전분을 맥아당으로 바꿔주는 효소는 57℃에서 활동을 시작해 75℃가 되면 손을 놓는다.
따라서 이 사이의 온도대에서 30분 정도 두었다가 본격적으로 익히는 게 바람직하다. 결국 오븐이 에어프라이어나 찜보다 고구마에게 더 좋은데, 없다면 최대한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구울 것을 권한다. 오븐을 쓴다면 맥아당을 활성화 시킨 뒤 180℃ 이하의 온도에서 마저 굽는다. 드럼통 오븐을 흉내내 온도를 너무 높이면 겉은 타고 속은 말라 고구마가 초라해진다. 다 구운 고구마는 완전히 식힌 뒤 지퍼백에 담아 냉동 보관했다가 크기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1~2분 돌린다. 갓 구운 것과 최대한 가까운 느낌으로 먹을 수 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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