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원주 부론면 폐사지
이름 한번 거창하다. 원주 부론면(富論面)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를 논하는 고을’이다.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엔 이미 고려시대에 나라의 세곡을 소송하고 보관하는 조창인 흥원창이 설치돼 경제활동의 요지였다. 여러 지역의 물자가 모이고 사람이 왕래하니 새로운 소식을 주고받는 장이 펼쳐졌고, 정치와 경제에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이들이 많았으니 자연히 공론의 장이었다. 돈과 사람만 몰린 것이 아니라 당시 국가의 지도 이념이었던 불교 사원도 덩달아 번창했다.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 즉, 국사(國師)를 배출한 두 개의 대형 사찰이 있었다. 흥원창이 이름만 남고 흔적 없이 사라진 것처럼 남한강 인근의 두 사찰, 법천사와 거돈사 역시 현재는 원주를 대표하는 절터로만 남아 있다.
떠돌이 생활 110년, 지광국사탑 기다리는 법천사지
전각이 사라진 절터는 쓸쓸하기 마련이다. 화려하고 웅장했을 목조 건물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둥을 떠받치던 석재가 아무렇게나 뒹굴어 시절의 덧없음을 반추하는 장소로 인식된다. 부론면 법천사지는 조금 다르다. 구석에 남겨진 석재 유물이 텅 빈 공간을 단단히 채우고 있다. 절터 자체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문화재자료에 이름을 올린 당간지주 외에 국보가 2점이다. 그런데 2개의 국보 중 현장에는 지광국사의 공적을 기록한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만 있고, 그의 혼을 담은 부도인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은 현재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이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국사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으로 문화재청에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는 유물이다. 1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한 탑의 역사가 기구하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골동품상이었던 일본인 모리가에 의해 반출돼 서울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다. 이듬해에는 실업가인 와다 쓰네이치에게 매각돼 그의 저택 정원으로 이전했다가 후지타 헤이타로 남작에게 팔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같은 해 말에는 불법 매각과 반출을 확인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국내로 환수된다. 한국의 문화재를 아끼는 선의가 아니라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국내로 돌아온 후에도 승탑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15년 경복궁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앞 정원에 자리 잡았던 탑은 1923년 경회루 동편 근정문 부근으로 옮겨지고, 1932년엔 해체를 거쳐 경회루 동편 사정전과 아미산 사이에 다시 세워진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으로 박살이 난 탑은 1957년 흩어진 조각을 모아 시멘트로 복원된다. 1990년에는 경복궁 복원사업을 하며 다시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뒤뜰로 이전된다. 모르타르를 덧붙여 조악하게 복원한 탑은 정밀 진단 결과 다수의 균열과 탈락이 확인돼 2016년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로 옮겨졌다. 특히 옥개석(머릿돌)은 절반 가까이 석재가 아니라 시멘트 덩어리였다. 제자리를 떠나 무려 아홉 번이나 이곳저곳을 떠돌던 고승의 혼은 5년여의 보존 처리 과정을 마무리하고 고향 원주로의 귀환을 앞둔 상태다. 원래 자리인 탑비 앞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별도의 보호 시설을 지어 탑비와 함께 그 안에 보관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승탑을 기다리는 지광국사탑비 역시 당대 석공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구름 위를 헤엄치는 듯한 받침돌의 거북은 턱밑에 기다란 수염을 달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생김새가 용에 가깝다. 몸돌 양 옆면에 새겨진 두 마리 용도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몸돌 상부의 세밀한 조각 역시 당시 석공의 기교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법천사는 고려 초기 김제 금산사와 함께 개성 밖에 있는 지방의 선종 사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절이다. 무신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 사찰로 왕실과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09년 허균이 방문했을 때 이미 폐허였다는 기록이 있어 정확히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법천사지 전체 부지는 약 15만㎡로 웬만한 대학 캠퍼스와 맞먹는다. 절 어귀의 당간지주에서 지광국사탑비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약 15년에 걸쳐 경내에 있던 민가를 이전하고 기본적인 발굴 조사를 마무리하는 등 절터는 110년 만에 돌아오는 국보를 맞을 준비로 살짝 들떠 있는 듯 보인다. 남아 있는 초석을 중심으로 전각이 있었던 자리를 일부 정비했고, 땅속에 묻혔던 석재는 흙을 걷어 낸 상태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언뜻 폐허처럼 보이는 황량한 절터를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서 있다. 반대편이 훤히 보일 정도로 속이 비었지만, 무쇠다리처럼 든든히 버티고 선 모습이 고승의 자태다. 묵묵히 이 절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승탑, 법천사지 닮은꼴 거돈사지
직선거리로 약 3㎞(찻길로는 10㎞) 떨어진 거돈사지 역시 법천사지와 비슷한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 처음 지어져 고려시대에 확장됐고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후에 천태종에 흡수된다.
들머리에 절의 나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석축을 감싼 채 뿌리내리고 있고, 금당터ㆍ강당터ㆍ승방터와 회랑의 자취 등이 비교적 말끔하게 정비된 상태다. 절터에는 3층 석탑(보물 제750호)과 불상을 잃은 커다란 항아리 모양의 석재 좌대가 버티고 있다.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종(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가 있다. 등껍질에 선명한 ‘만(卍)’자 문양이 지광국사탑비의 ‘왕(王)’자와 대비된다. 탑비와 짝을 이루는 부도인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은 절터 뒤편 산기슭에 자리 잡았다. 한눈에 봐도 마모가 적고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이유인즉 2007년 새로 제작해 세웠기 때문이다. 원공국사탑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일본인이 정원 장식용으로 쓰기 위해 서울로 반출했다. 1948년 성북동의 어느 저택에서 발견된 탑은 경복궁으로 이전됐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자리 잡았다. 지광국사탑과 달리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본래의 위치에 모사품을 세우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경우다.
절터 바로 아래 옛 정산분교 운동장에는 거대한 당간지주가 하나 누워 있다. 학교가 문닫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쉬거나 볕을 쬐기 좋은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짝을 이뤄야 할 당간지주가 하나만 남은 까닭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고 유머 섞인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누나와 동생이 인근 봉림산 자락 사기막골에서 제작된 당간지주를 누가 먼저 옮기나 내기를 했는데, 누나의 잔꾀에 속은 동생이 설사를 하는 바람에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누나가 옮긴 지주도 짝이 없어 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다. 당간지주가 있는 폐교는 ‘원주거돈사지전시관’으로 단장해 올해 안에 일반에 개방할 예정이다. 폐사지와 폐교가 결합해 또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탄생하는 셈이다. 거돈사지는 법천사지의 절반 규모로 비교적 깔끔하게 정비된 상태여서 잊힌 절터의 아늑한 정취에 빠져들기 좋은 곳이다.
화강암을 반죽 주무르듯…흥법사지와 사라진 문화재
부론면에서 섬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지정면에 또 다른 폐사지 흥법사지가 있다. 절터에는 현재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이 남아 있다. 진공대사(869∼940)는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귀국한 후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 왕사는 임금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로 국사보다 한 단계 낮은 직위다. 흥법사에 머물다 태조 23년 입적한 후에 왕건이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현장의 탑비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있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지가 분리된 꼴이니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탑이나 거돈사지의 원공국사탑보다 가혹한 운명이다. 그 와중에 높아서 보기 힘든 머릿돌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는 점이 관람객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이다. 머릿돌 앞면 중앙에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조각돼 있다. 꿈틀거리는 몸동작은 기운이 넘치고, 수염에 비늘까지 살아 움직이는 듯 섬세하게 표현했다. 석재 중에서도 단단한 화강암을 떡 반죽 주무르듯 다룬 당시 석공의 기교에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당대의 큰 사찰이었을 절터는 대부분 사유지여서 현재 탑비와 삼층석탑 주위만 정비돼 있다. 탑비와 맞붙은 밭에는 들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한 그물이 둘러져 있고, 바로 뒤편에는 민가가 자리 잡아 부론면의 두 절터에 비하면 옹색하기 그지 없다. 부도인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역시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진 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문화재는 본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처럼 타지를 떠돌고 있는 진공대사의 혼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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