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전통 주거양식인 한옥은 현대사회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 됐다. TV와 휴대폰에 시선을 뺏긴 현대인에게 쪽마루에 걸터앉아 마당 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쉽게 누릴 수 없는 여유다. 직장을 관두고 잃어버린 로망과 여유를 찾아나선 편성준(55)ㆍ윤혜자(51) 부부는 지난해 3월 이제는 몇 채 남지 않은 서울 성북동의 작은 한옥(대지면적 105㎡ㆍ건축면적 53㎡)을 사서 고쳤다. 성북동 언덕배기 양옥에서 살았던 부부는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비어 있던 한옥을 발견했다. 부부는 동시에 ‘이 공간이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퇴사하고 한옥 사는 부부
느지막이 마흔 넘은 나이에 만나 결혼한 부부는 ‘자발적 백수’다. 둘은 아이는 없고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산다. 출판사에서 기획업무를 했던 윤씨는 몇 년 전 퇴사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30년 가까이 근무했던 편씨도 이어 일을 관뒀다. 편씨는 “남들이 시키는 일을 계속해왔다면 이제 한번 멈추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내가 정말 재미있어 하는 일은 뭘까’를 고민해보고 싶었다”며 “회사를 안 다니면 정말 굶어 죽는지 모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책을 기획할 때 몇 부가 팔릴지 수익을 따지는 게 먼저였는데, 그렇게 책을 만드는 게 제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제 능력으로 하고 싶은 기획을 마음껏 해보고 싶었다.”
회사를 관뒀다고 무작정 쉬는 건 아니다. 편씨는 “완전히 지쳐서 아무것도 못 하고 회복하는 게 쉬는 거라면, 노는 건 적극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이라며 “회사를 다니면서 못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찾고, 깊이 빠져들고, 생산적인 것으로 연결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씨는 “노는 것은 창의적인 과정이 들어가는 것”이라며 “둘이 놀면서 하는 얘기가 기획이 되고, 실행이 되면 놀이에서 자연스럽게 일로 발전된다”고 덧붙였다. 놀면서 낸 성과도 작지 않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부부는 독서 모임을 운영한다. 요리를 잘하는 아내는 요리수업을 기획했다. 전국의 첨단기술과 농업을 접목한 스마트 팜을 찾아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아내가 기획하고, 남편이 글을 쓴 첫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몽스북 발행)를 냈다.
안정적인 직장만 걷어찬 게 아니다. 이들이 사서 고친 16평짜리 80년 된 한옥은 인근 20평대 신축 아파트값과 맞먹는다. 부부는 “결혼하고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파트에선 담근 장이 잘 익질 않았다”라며 “직장이 원하는 일의 방식이 아니었다면, 아파트는 원하는 주거 방식이 아니었다”고 했다.
유한계급의 자아실현과도 거리가 멀다. 부부는 한옥을 사서 고치면서 대출도 꽤 받았다. “물론 우리도 떨려요. 돈도 절실히 필요하고요. 하지만 뭔가를 계속 기획하고 시도하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 거예요. 계속 미뤄왔던 일상의 행복들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비싼 가방이나 좋은 오디오, 고급 자동차 등을 소장 목록에서 지웠어요. 이것은 ‘정신 승리’가 아니에요. 다만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창직을 위한 놀이 플랫폼
골목 깊숙한 부부의 집은 1939년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집을 수선하다 겹겹의 벽지를 벗겨내 보니 소화 14년(1939년)에 만든 신문이 붙어있었다. 부부는 이를 떼내 집 대문 안쪽에 걸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마당을 품은 한옥이 디귿(ㄷ)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마당이다. 툇마루에 앉아 텅 빈 마당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마당 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행복하다. 여름이면 지인들을 불러 작은 수영장을 만들고, 가을이면 화로에 고기와 고구마를 굽는다. 올해는 마당에서 작은 공연도 열 생각이다.
지붕과 대들보, 서까래, 기단 등 집의 원형은 그대로 살리는 대신 내부 공간은 현대식으로 바꿨다. 단열을 보강하기 위해 삼중 유리 창호를 달고 바닥은 에폭시 도장으로 마감했다. 대청이 있었을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은 주방, 오른쪽은 작업실이다. 거실에는 TV와 소파 대신 6인용 테이블을 뒀다. 벽에는 책 크기에 맞게 짠 책장을 넣었다. 부부는 “TV와 소파가 있으면 대화가 단절되고 널브러지기 쉬운데, 테이블을 두니 대화도 자주하게 되고 책도 많이 읽게 된다”고 했다.
원래 방이었던 자리엔 벽을 허물고 주방을 만들었다. 부부는 매일 두 끼 직접 담근 장과 김치로 식사한다. 주방에는 공간에 알맞게 짠 선반과 목공 장인 이규석씨가 선물한 원목 조리대 상판 등으로 꾸몄다. 작업실에는 한식 창호를 살린 접이식 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부부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새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부부의 방과 화장실은 주방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다. 손님들이 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사생활이 보호된다. 부부의 방은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찬다. 윤씨는 “붕 떠 있는 것 같아 침대를 선호하지 않았다”라며 “아침에 일어날 때 창 밖으로 마당과 하늘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한옥에 오면서 수납공간이 줄었다. 부부는 책과 옷, 그릇 등을 많이 정리했다. 가구도 최소화했다. “하나의 물건을 들일 때 정말 필요한지, 오래 입고 쓸 건지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자원 낭비가 덜하고, 생활은 바지런해졌어요. 한옥이 주는 강요된 매력인 것 같아요.” ‘작지만 행복한 집’이라는 뜻에서 집 이름을 ‘성북동 소행성(小幸星)’이라 지었다.
둘이 살지만 여럿이 쓴다. 부부는 “다른 사람과 회의를 하거나, 모임을 할 때도 집에서 많이 하게 됐다”라며 “이 집을 기반으로 다양한 콘텐츠들이 왔다갔다하고, 취향과 뜻이 잘 맞는 이들이 함께 모이고, 풍성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올해 '창직(創職)'의 한 해를 보낼 생각이다. “둘이 이렇게 집에서 살면서 스스로 일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한 해가 될 거예요. 그 공간이 집이 되겠죠. 이 집을 플랫폼 삼아서 재미있게 해볼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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