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7> 서울 영등포, 성북구 개량기와집 골목
요즘 사람들은 '서울의 한옥'이라고 하면 북촌과 서촌의 'ㄷ'자 기와집 건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한옥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몇백 년된 유서 깊은 건물이라는 이미지를 품고는 한다. 오늘 이야기는 이러한 이미지가 정말 정확한 것인지를 살피면서 시작한다.
우선 '한옥'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한옥(韓屋)이란 '한반도, 한국, 한국 시민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장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 지금 한국 시민이 살고 있는 아파트도 한옥이다. 최근 토목가 양동신 선생의 '아파트가 어때서'(사이드웨이, 2020)를 읽어보면 잘 느끼겠지만, 현대 한국의 아파트는 '닭장' '군대 병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나름의 발전을 이룬 끝에 인구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효율적인 주거가 됐다. 또 '집장사집'이라 불리며 1960~80년대 지어진 수많은 단독주택, 빌라 또한 '한반도, 한국, 한국 시민의 집'인 한옥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많은 시민은 아파트, 단독주택, 빌라를 한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현대 한국에서 한옥이라 불리는 건물이 어떤 형태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한옥공모전'이다. 2020년 모집 요강에 따르면 "한옥은 양옥과 대비되는 용어로 '한국의 정체성이 반영된 건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재료 등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서도 "지속가능성과 미래 지구환경 등을 고려할 때 목재의 대량사용을 권장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공모전의 기존 수상작을 보면 거의 모두 기와집이다. 이 공모전이 상정하는 한옥은 기와집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다.
그러나 한옥이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 이전의 건물만을 가리킨다고 일단 받아들이더라도, '한국의 정체성이 반영된 건축'인 한옥이 곧 기와집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옥 가운데 독특한 것으로는 울릉도의 투막집과 너와집, 제주 전통 초가, 뗏집 등이 있고, 원래 한반도 주민 대부분에 해당하는 평민과 노비는 초가집에 살았다. 이들 평민과 노비의 후손이 대부분인 한국 시민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설 무렵까지는 대체로 흙으로 만든 초가집에 살았다. 잘 알려져 있듯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펼치면서 초가집의 개량을 밀어붙였다. 1970~80년대 여성 공장 노동자 문학을 대표하는 장남수 선생의 '빼앗긴 일터'(창작과비평사, 1984)에는 초가집을 불온시하는 정부 시책에 당황하는 당시 한국 시민의 심정이 잘 표현돼 있다.
집으로 한 발 들여놓는 순간 아래채 지붕이 벗겨진 게 보였다.
"가시나, 이기 누고?"
가족들이 달려나왔다.
"우리 지붕 왜 저래요?"
나는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초가지붕은 다 벗겨내고 스레트로 하라꼬 민서기가 하도 캐싸서 비끼는 놨는데 우째 할랑강 모르겠다 아이가."
"스레트로 이으려면 돈 들잖아요? 우리집에 무슨 돈이 있다구."
"그랑꺠내 저래 놓고 못하고 있는 거 아이가? 엄두를 못 내고......"
"그러면 아예 그대로 두지 그러셨어요?"
"야야, 민서기 독촉 때문에 살 수가 있는강?"
"면서기는 왜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만들어요?"
"그 사람들도 할 수 없는기라. 지들도 할 수 없음니더. 빨리 좀 걷어주이소, 하고 사정을 하는데 우짤기고?"
"뭐 스레트만 입히고 울긋불긋 색칠하고 그러면 새마을이 다 되나, 집안엔 빚투성인데......"(45쪽)
한국의 평민과 노비들이 수천 년 살아온 초가집과 뗏집은 이렇게 명맥이 끊겼다. 초가집과 뗏집이 사라짐과 동시에, 족보를 위조해 모든 사람이 양반의 후손임을 자부하며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는 한반도의 독특한 의식이 발동한 결과, 오늘날 한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대대로 목조 기와집에 살던 양반이었다는 거대한 착각을 하게 됐다. 조선시대까지는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던 제사 역시 박정희 정권이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함으로써 모든 가정에서 이뤄질 수 있게 됐다. 매우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대 한국 시민은 박정희 시절에 모두 '양반의 후손'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양반의 후손'이라는 착각을 하기 전의 한옥은 곧 초가집이었다. 조선시대 소수의 지배 집단이 살던 궁궐과 99간 기와집은 한옥을 대표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 건물을 '한옥'이 아닌 '기와집'이라고 지칭하며, 20세기에 세워진 기와집을 '개량 한옥'이 아니라 '개량 기와집'이라 부른다.
서울 사대문 지역을 넓게 차지하던 양반들의 기와집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체로 헐렸고, 헐린 자리의 필지를 쪼개 들어선 것이 정세권, 마종유 등의 '디벨로퍼'들이 20세기 초에 세운 개량 기와집이었다. 김경민 선생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 2017) 출간으로 주목받게 된 '디벨로퍼' 또는 '집장사'들은 북촌과 서촌, 익선동은 물론 오늘날 서울 사대문 안팎에 넓게 개량 기와집 단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한옥 마을'이라고 하면 서울의 북촌, 서촌이나 전주의 교동, 풍남동 등의 개량 기와집 블록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한옥 마을' 즉 20세기 전기에 건설된 '개량 기와집 단지'의 문제는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데 있다. 한옥 붐이 일기 직전인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이들 지역의 개량 기와집이 대거 빌라나 오피스텔 등으로 재건축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책 입안자들도 이들 개량 기와집이 전통의 일부라는 인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개량 기와집이 밀집한 블록을 보존하자고 하기에는 시민의 공감대가 부족했다.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 선생은 서촌의 개량 기와집을 구입해 보존하려다 주변 주민들과 충돌을 겪었다. 2009년쯤 서울시가 서촌 개량 기와집 블록의 보존을 추진하기 위해 주민 설명회를 열자 "어떤 주민이 '한옥 보존 반대'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무대로 나와 책상을 뒤엎었다"고 한다. 파우저 선생은 이렇게 한탄한다. "붉은 벽돌의 골목과 기와가 물결치는 한옥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국인들이 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지가 늘 의문이었다"(한국일보 2016년5월10일자). 불과 10여년 전의 일이다.
파우저 선생은 서울 서촌의 개량 기와집에 대한 애정을 담아 '서촌 홀릭'(살림, 2014)을 출간했고, 서울 북촌의 개량 기와집을 찬미하는 책과 포스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서촌과 북촌의 개량 기와집은 이미 많이 헐려나간 상태다. 뒤늦게 개량 기와집을 새로 짓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관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왜 시민들은 서촌과 북촌, 전주의 한옥 마을에서만 개량 기와집을 찾고, 이들 지역에 한옥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것일까. 서울의 경우, 사대문 바깥으로 눈 돌리면 멋지게 지어진 개량 기와집이 수없이 많다. 경성 전차의 동북쪽 종점이던 미아리 고개 남쪽 성북구 돈암동, 혜화동, 동선동, 길음동, 하월곡동, 정릉동, 그리고 경성 버스의 서남쪽 종점이던 영등포구 당산동, 양평동, 영등포동 등에는 20세기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 지어진 개량 기와집들이 아직 잘 남아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보문동과 안암동에도 한때 거대한 개량 기와집 단지가 존재했다.
경성 시절 서울과 경인 지역의 도시 계획을 연구한 염복규 선생은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데아, 2016)에서 1938년 이뤄진 돈암동 신도시 개발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개량 기와집에서 영업하는 점술가 분들이 모여 있는, 흔히 '미아리 점집촌'이라 불리는 지역도 포함된다. 사대문에서 멀지 않은 근교 지역에 내선(內鮮), 즉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거주하는 신도시를 개발하겠다는 목적의 돈암지구 구획정리 사업은 영등포 지역 구획정리 사업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결과 돈암동을 중심으로 한 성북구 일원, 그리고 영등포역 북부의 영등포구 일원에 개량 기와집이 대량으로 건설됐다. 이 문제에 관심 있으신 분은 염복규 선생의 책과 이경아 선생의 '경성의 주택지-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집, 2019) 등을 참고하시면 되겠다.
국가기록원에는 1938년에 작성된 '경성부 영등포 및 돈암 토지구획정리비 기채의 건'이라는 문서가 소장돼 있다. 이 문서에는 두 지역의 토지구획 평면도가 실려 있는데, 오늘날까지 당시의 도시 구획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구도심에서 이 평면도를 들고 돌아다니면 개량 기와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돈암지구의 개량 기와집이 주로 1938년 신도시 건설기에 세워진 것이라면, 영등포구의 영등포동, 당산동 일대에 남아있는 개량 기와집은 이르면 1910년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시흥시와는 영역이 전혀 겹치지 않은 옛 시흥군의 군청이 1911년 영등포역 앞에 자리하면서 영등포의 도심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의 도심은 1938년 토지구획 정리사업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뚜렷이 그 형태를 남기고 있다. 서쪽 영등포유통상가교차로에서 동쪽 영등포중앙시장에 걸친 영등포 구도심에는 수많은 옛 길과 개량 기와집이 존재한다. 이 블록의 척추에 해당하는 길은 당산로10길-당산로16길-영신로44길-영중로24길로 이어진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현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개량 기와집 블록은 북촌, 서촌이 아니라 바로 여기라고.
사람들은 문화의 에센스가 지리적 중앙에 남아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옛 문화가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중앙이 아닌 외곽이다. 당나라 고문서와 송나라의 주자학이 베이징이 아니라 서쪽 변경인 둔황과 동쪽 외곽인 한반도에 남은 것도 이런 이치다. 20세기 서울의 개량 기와집도 북촌과 서촌이 아닌 성북구와 영등포구에 가장 많이, 가장 잘 남아 있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 서촌의 개량 기와집 보존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 거셌던 것처럼, 2021년 현재도 성북구와 영등포구의 개량 기와집 블록이 무관심 속에 철거되고 있다. 최근에는 지하철4호선 길음역 7번 출구 근처, 삼각형 모양의 성북구 길음동 개량 기와집 블록이 재건축을 위해 철거됐다.
나는 2018년부터 2년간 시간 날 때마다 이 지역의 골목길을 훑었다. 길음동의 20세기 전기에 지어진 개량 기와집 벽에는 당시 장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문양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지만, 이를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성북구와 영등포구 구도심의 개량 기와집을 샅샅이 기록하고 남길 만한 건물은 보존하는 것이 북촌과 서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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