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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이미지에 가린 서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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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1월, 수인 번호 '264'를 달고 대구형무소 추운 감방에 갇혀 있었을 당시의 이육사는 시를 발표하기 전, 그러니까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뒤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무렵이었다. 32세 청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테러 직후 경찰은 지역 요주의 인물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며 이육사의 네 형제도 끌고 갔다. 만 23세의 시인은 광복단원으로서 만주, 러시아를 누비던 동향 선배 장진홍을, 최소한 이름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 31개월 미결수로 갇혀 수시로 고문당하면서 이육사는 장진홍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겹쳐 보고, 수없이 불리었을 수인번호도 나직이 소리 내어 되뇌기도 했을 것이다. '264....' 시인의 언어적 감성에 그 소리의 질감이 썩 탐탁했던 모양이다. 언뜻 들어서는, 숫자(수인번호)라는 느낌도 없어 '나 이런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는 듯한 치기(稚氣)를 가릴 수 있고, 운율도 은근히 다부져서 운명의 좌대로 쓸 만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는 출옥 이듬해인 1930년 10월 '별건곤'이란 잡지에 수난기 지역 사회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모색한 글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발표하면서 '이활(大邱二六四)'이란 필명을 처음 썼다. 앞서 그는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자신의 첫 시 '말'을 발표하며 1926년부터 써온 '이활(李活)'이란 필명을 썼다. "(...)서리에 번적이는 네굽/ 오! 구름을 헷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 그는 한자를 세 차례 바꿔 1932년 무렵부터 '육사(陸史)'라는 필명을 썼고, 동생이 1946년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발행하며 저 이름으로 굳어졌다.
남아 있는 그의 시는 한시 3편을 포함해 모두 40편. 투사적 이미지가 강하고 '광야'나 '절정'같은 힘찬 시들이 또 절창이어서, '청포도'같은 서정시가 오히려 예외로 여겨지지만, 그의 시들은 오히려 토속적이고 감각적이고 따사로이 해학적인 것들이 더 많다. "표모(漂母)의 방망이 소린 왜 저리 모날가요/ 쨍쨍한 이 볕살에 누더기만 빨기는 짜증이 난 게죠"( '춘수삼제(春愁三題)', 35.6) 육사 이원록이 1944년 1월 16일 옥사했다. 향년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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