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관습보다 '인권' 택한 법원... "반인도적 범죄엔 국가면제 적용 안돼"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반인도적 범죄의 경우, ‘한 국가의 행위에 대해 다른 나라의 법원이 심판할 수 없다’는 국가(주권)면제론을 적용해선 안 된다고 우리 사법부가 처음으로 내린 판단이기도 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 김정곤)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일본 정부가 이날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항소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한 만큼, 이번 판결은 항소기한(판결문 송달 후 2주 내)이 지나면 그대로 확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날 법원의 판결은 우리 법원이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사상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승소로 확정된 바 있지만, 이번 판결은 기업이 아니라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최대 쟁점은 주권면제론의 적용 여부였다. 1998년 대법원이 “국가가 계약의 당사자(사경제주체)인 경우에는 주권면제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 판례가 있긴 하나, 위안부 사건처럼 ‘다른 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행위’에 대한 사법관할권을 판단한 전례는 없었다. 이번 소송의 결과를 예상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이유다.
게다가 주권면제론은 해외에서도 찬반이 팽팽한 사안이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페리니’ 사건에서 판단이 엇갈린 바 있다.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자국민 페리니가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탈리아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해 원고 승소 판결했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보편 원칙(강행규범)을 위반한 국가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재판관 12대 3의 의견으로 “이탈리아가 국제법을 위반했다”면서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년 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에서 이 판결은 다시 뒤집힌다. 이탈리아 헌재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주권면제를 적용하면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이 침해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주권면제는 ‘관습’과 ‘인류 보편의 가치’ 중 선택의 문제인 셈이다.
그리고 한국 법원의 이날 판결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주권면제론은 국가가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 형성된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인권적 행위에도 주권면제론을 적용한다면, 이를 금지한 다수의 국제 협약에 위반되는 행위를 제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위안부 사건에서 주권면제론을 적용할 경우, “피해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재판부는 강조했다. 그동안 일본이나 미국의 법원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제기한 민사 소송을 모두 기각하거나 각하한 예를 든 재판부는 “협상력이나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개인에 불과한 원고들은 이 사건 소송 외에는 구체적인 손해를 배상 받을 방법이 요원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있다는 걸 법원이 인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재판부는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1965년 협정과 관련,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 등 3가지는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히며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2015년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마무리한다’고 합의했으나, 2019년 헌재는 “정치적 합의에 불과하다”며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결국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한국 법원의 재판 관할권과 피해 할머니들의 청구권을 모두 인정했다는 게 이번 판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재판부는 위안부 동원 당시의 지속적인 폭행과 그에 따른 상해, 2차 대전 종전 이후의 정신적 상처 등을 언급한 뒤, “이 사건 행위는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며, 피고가 지급해야 할 위자료는 ‘1억원 이상’이라 봄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