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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겪으며 결집했던 日, '포스트 코로나'엔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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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수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새해가 밝았으나 팬데믹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코로나 (corona)’란 일식 혹은 월식 때 태양이나 달 주변에 생기는 아름다운 빛의 궤적을 뜻한다. 이 찬란한 이름을 가진 바이러스가 전세계 사람들의 건강을?더 정확히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의료 시스템을? 위협한 지 어언 1년이 다가온다. 인류가 미지의 바이러스와 대치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고 결국은 공존의 방식을 찾아냈다. 그 역사를 거울삼아 이 비일상적인 상황도 언젠가는 끝나리라 믿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 이전의 사회로 고스란히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호사가들은 벌써 ‘포스트 코로나’니 ‘뉴 노멀’이니 경제 회복에 초점을 둔 전망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예측들을 쉽게 신뢰하지는 못하겠다. 자본주의가 글로벌 사회의 중요한 운영 원리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의 삶은 경제적인 수치만으로 설명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모두 함께 팬데믹 동굴에 갇힌 상태다. 수많은 주체가 맞닥뜨린 제각각의 고통과 대응 전략을 그 누가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데믹이 인류에 드리울 명암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전모를 드러낼 것이다.
◇지진을 모르면 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
거시적인 재난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 구성원의 세계관에 흔적을 남긴다. 다시 말하자면,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세계관에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겪은 공통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회의 중요한 변수는 지진이다. 단언컨대, 땅이 통째로 흔들리는 이 혹독한 자연 재난을 떼어놓고 일본 사회를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은 자타공인 지진 대국이다. 2011년, 수도권을 포함해 일본 열도의 광범위한 동쪽 지역에 피해를 입힌 ‘동일본 대지진’(리히터 규모 M 9.0)은1만5,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곧이어 후쿠시마현을 덮친 지진해일은 최첨단 원자력 발전소를 재기불능 상태로 몰아넣었다. 1994년, ‘한신대지진’(M 7.3) 때에는 고베의 시가지가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6,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슬러 올라가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 인근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관동대지진’(최대 추정 M 8.3) 의 사망자는 10만명이 넘는다. 불과 1세기도 안 되는, 짧다면 짧은 기간에 순식간에 삶의 근거지가 폐허로 변하는 끔찍한 재난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강진의 20%가 일본 열도와 인근 바다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지진 발생이 늘고 있다지만 일본 사회가 경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도쿄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위험을 느끼고 휘청거리는 건물에서 황급히 튀어 나왔지만 세상 천지 사방에 안전한 곳이 없었다. 땅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무엇이 나를 보호할 수 있으며 누가 나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원지에서 수백km 떨어진 도쿄에서도 이런 암담한 경험을 했는데, 가장 진동이 컸던 동북 지역에서는 어땠을 지 상상만으로도 쭈뼛하다. 동일본대지진 같은 대규모 재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잘 보도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지진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인명 피해를 낳을 수도 있는 진도 4~5 내외도 별반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건축물이나 도로의 내진 설계가 비교적 충실하고 개인들도 지진에 대한 대처법을 잘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진도 4를 경험했을 때에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돌연 흔들리는 책상과 의자에 깜짝 놀란 데다가, 사방의 벽이 삐걱거리니 당장 건물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같이 있던 일본인 친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 정도 지진에 호들갑이면 도쿄에서 못 산다”며 웃어 넘겼다. 지금은 나도 그들처럼 진도 4 정도에는 덤덤하다. 흔들림이 좀 오래 간다 싶을 때에나 소셜미디어에서 진원지를 확인하는 정도다. 사회 전체적으로 철저하게 지진 대책을 수립해 놓고는 있지만, 동일본대지진 같이 무지막지한 규모의 재난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다들 안다. 지진에 대한 대화의 끝은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라는 다소 비관적인 운명론으로 마무리된다. 진취적인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고도 하겠지만, 인간에게는 대자연에 맞설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일찌감치 자연에 굴복하고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쓴 <캉디드>는 1755년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초토화시킨 리스본 대지진을 보고 겪은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풍자 소설이다. 주인공 캉디드는 지식과 사랑, 종교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 낙천적인 청년이다. 그는 대지진과 역병, 그리고 자연 재해를 빌미로 격화되는 마녀 사냥과 종교 전쟁 등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뒤 당시에 팽배했던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근거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지식은 위선적이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종교는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눈 앞의 밭을 가꾸는 데에나 힘쓰자’는 지극히 현세주의적인 조언을 건넨다. 가혹한 재난을 겪으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살면서 적어도 한번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대지진을 직접 경험하는 일본인들은 캉디드의 비관적이지만 세속적인 삶의 전략에 어렵지않게 공감할 것이다. 재난은 사회 구성원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동일본대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집단주의적 결속력이 강화되는 한편, 외부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이 한층 강해져서 정치적 우경화를 부채질하는 힘이 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 정보의 위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마주하게 될 것인가.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대지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재난이다. 대지진은 시가지를 폐허로 만드는 가시적 파괴력이 있지만, 바이러스의 해악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재난은 오로지 ‘정보’의 형태로 전달되고 확인된다.
평범하던 어느 날 팬데믹 위기가 ‘선언’되고 일상의 질서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업데이트되는 바이러스 확산 정보에 늘 귀를 기울이면서 일상 생활 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방역 당국이 매일 발표하는 환자의 숫자가 이 재난의 유일한 실체인 것이다. 의료진과 바이러스가 사투를 벌이는 방역 현장이 글로벌 팬데믹의 주전장이라면, ‘정보’ 역시 많은 이에게 재난의 실체로 기능하는 또 하나의 전선이다. 그러다 보니 방역 당국의 정책을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하고,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과학을 가장한 가짜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음모론이 판치는 한편, 전문 정보와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불신도 커지고 있다. 불량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과학이나 의료 등 전문 분야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가 저하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발전을 크게 방해할 것이다. 팬데믹보다 ‘인포데믹 (infodemic, 인터넷 공간에서 증폭되고 있는 과잉 정보의 부작용)’이 해롭다는 말을 실감한다.
재난 상황은 언젠가는 수습된다. 하지만 재난을 겪으면서 변화한 세계관은 이후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볼테르가 캉디드의 입을 빌어 주장한 비판적 계몽주의는 근대 사회의 중요한 사상적 흐름이 되었고, 동일본대지진은 아직도 일본 사회에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드리우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조만간 종식될 것이나, 정보의 신뢰성을 둘러싼 위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떠안을 가장 큰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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