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사는 이민 2세입니다. 제 부모님은 미국에 사시고, 처가는 한국에 있습니다. 결혼할 당시 저는 학생이었고, 아내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 일을 안 하는 상황이었어요. 지금은 제가 취직했지만,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태주고 있습니다. 제 월급만으로 생활이 빠듯하니 여행도 다니고, 아이와 외식도 하라는 뜻에서 먼저 나서서 도와주시겠다고 했어요. 제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자식은 절대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어요. 그런 부모님이 부담스러워서 한때 방황도 했어요. 아이를 낳고 한 가정의 가장이 돼보니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매우 큽니다. 많진 않지만 생활비를 받는 게 정말로 고맙고 한편으론 너무 부끄럽습니다.
최근 코로나19 탓에 아내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뵙지 못하니 매달 10만원씩 자동이체로 용돈을 드리자고 했어요. 저도 그러자고 했지만 “근데 우리 벌이의 3분의 1은 우리 부모님한테 오는 거 명심하자”고 덧붙인 게 화근이 됐어요. 아내는 기분이 나쁘다고 화를 냈고, 저는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을 매달 처가에 자동으로 보내는 것 같아 좀 그렇다”고 "한번씩 많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명심이란 단어가 기분이 나쁘다"면서 "처가에 10만원 드리는 게 그렇게 아까워?”라고 소릴 쳤어요.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한테 생활비를 받고 있으니 그 부분은 존중해 달라”고 말해봤지만, 감정이 상한 아내와의 싸움은 더 커졌습니다. 결국 저는 지쳐서 피했고, 아내는 저를 따라와서 소리지르면서 저를 밀쳤어요. 그러면서 아내는 “이혼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제 어머니에게 울며 불며 전화를 해서 와달라는 겁니다.
며칠 뒤에 아내에게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라고 했지만, 아내는 다시 흥분하며 “너는 그냥 우리 부모님한테 10만원 드리는 게 아까운 거야”라고 했고, 싸움은 다시 반복됐어요. 저는 지금까지 처가에 뭔가 해드릴 때 따진 적이 없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에 늘 더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저렇게 반응하니 제 부모님께 생활비를 지원받으면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느끼는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아내와 저는 성격이 너무 달라요. 아내는 욱하는 성격이 있고, 감정적이어서 작은 일도 크게 받아들여요. 반면 저는 이성적인 편입니다. 아내는 싸울 때마다 저를 협박하듯 “아이 데리고 한국에 갈 거다” “이혼해”라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본인 감정대로 행동하는 아내를 보면 너무 실망스럽고, 제가 단지 이혼을 막으려고 아내와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재원(가명ㆍ31ㆍ직장인)
재원씨, 사연을 읽고 결혼하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두 분이 결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쉽게 말하면 성격이 맞지 않는 거지요. 부부들이 찰떡처럼 잘 맞진 않겠지만, 결혼은 대체로 부부가 서로 다른 부분을 맞춰 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두 분한테서는 그런 맞춰가는 노력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각자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자기 감정을 표현할 뿐이죠. 그래서 아주 사소한 문제도 결국 큰 싸움, 이혼하자는 얘기로 끝나요. 소통에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소통이 잘 안 되니 당신뿐 아니라 아내도 답답하고, 힘들 거예요.
저는 누가 더 잘못했고, 누가 더 잘했는지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두 분의 문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각자가 갖고 있는 성격 특성과 취약점이 결혼을 통해 양쪽이 맞물리면서 갈등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각각의 취약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는 데서 관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먼저 아내는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을까요.
아내는 결혼을 계기로 미국에 왔어요. 재원씨는 미국 생활이 큰 불편함이 없겠지만 아내는 다를 거예요. 당신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적응의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누구도 아내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지 않았어도 살아온 환경이 바뀌면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고 불안해집니다. 자신감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별 것 아닌 일조차도 마음에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갑자기 살게 된 미국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고 외벌이에 시부모님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다는 것도 아내의 자신감을 많이 떨어트렸을 거예요.
아내가 친정 부모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자고 한 건, 부모를 챙기는 면도 있겠지만 그 행위가 아내에게는 편안한 고국과 부모와 연결된 끈 같았을 거예요. 매달 뭔가를 해드린다는 느낌이 외로운 아내에게 안정감을 주는 상징 같은 거지요. 그래서 재원씨의 얘기가 틀린 건 아니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돈의 출처나 액수만 따지는 것처럼 들렸을 거예요. 아마 저는 이 부분을 재원씨가 놓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아내가 시부모님이 생활비를 보태주는 게 고마운 일인지 모르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얘기가 나오면 고마운 마음보다 자존심이 상하고 내면의 답답함이 건드려져서 폭발하게 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고, 사는 게 불편하고, 혼자 동떨어져 외롭고 막막한 느낌이 딱 건드려지는 거죠.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이혼해’라고 표현해왔던 것 같아요. 아내의 ‘이혼해’는 ‘나 혼자인 것 같고, 너무 외로운데 당신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하겠고, 한국에 가고 싶어’라는 마음을 잘못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아내는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 같아요. 생각과 감정이 조화롭게 분배돼 있어야 하는데 아내는 감정이 훨씬 많고 앞서는 분이에요. 감정이 쉽게 건드려지고 작은 감정도 빠르게 증폭이 되지요. 그래서 본인 감정에 압도되면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나고 그 뒤에는 일이 꼬이고, 일을 그르치게 되지요. 감정이 건드려지면 ‘이혼해’라는 극단적인 말을 내뱉고, 소리를 지르고, 손이 나가는 등의 충동적인 행위를 통해 감정을 표출해요. 아무리 아내의 마음이 힘들고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해도 갈등 상황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욱이 아이를 위해서도 그러면 안 되지요. 재원씨가 아닌 그 누구라도 아내의 이런 면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거에요. 친정 부모에게 용돈을 보내는 것도 아내가 “매달 용돈을 드리면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것 같고, 나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같아”라고 얘기했다면 당신이 충분히 납득했을 거예요.
재원씨는 어떤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까요. 당신은 아내와 달리 생각과 감정의 균형에서 지극히 생각의 비중이 큰 것 같아요. 언제나 감정보다 논리가 중요하죠. 이런 특징이 나쁜 건 아니지만, 생각과 감정은 조화를 이뤄야 해요. 생각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감정을 통해 남의 생각을 이해하죠. 그런데 감정적인 아내와 이성적인 재원씨가 극단에 있으니 서로 소통이 안 됐던 것 같아요.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는 감정적으로 소통해야 해요.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어, 진정해봐, 당신도 마음이 힘든 거지,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보자” 이렇게 하는 게 감정을 처리하는 거예요. 아내 행동의 옳고 그름을 짚고 넘어가는 것은 아내의 감정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거예요.
재원씨가 ‘부모님이 생활비를 주는 것을 명심하라’고 한 것은 아내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내의 감정을 공감한 건 아니에요. 공감은 나와 의견이 달라도 상대의 마음을 수용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요구나 감정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말해요. 아내가 “명심하라고 한 게 기분 나빴다”고 했을 때 “그래, 당신 기분이 나빴겠다”라고 하면 공감이지만, “왜 그 단어에 그렇게 집착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잘 생각을 해보라고”라고 하는 건 의견이에요. 재원씨는 논리적이지 않거나 비합리적인 것을 못 견디는 특징이 있어요. 그래서 아내와의 대화가 견디기 힘들고 무력감이 들고 우울해질 거에요. 그럴수록 자꾸 생각을 바꿔주려고 아내에게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지적하다 보니 감정적인 아내와 관계가 계속 틀어지는 것 같아요. 아내도 남편에게 감정을 전달하려다가 통하지 않으니 견디기 힘들고 울화통이 터지고 화만 내는 것 같아요.
그리고 부모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부분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생활비 도움을 받는 게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맞지만 고맙게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면서 향후 연봉이 오르면 부모에게 잘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해드리면 됩니다. 도움을 받아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너무 몰두해 있으면 스스로 불편해지고, 그게 아내에게도 의도치 않게 압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두 분이 상대에게 서운하고 화나는 것에만 몰두하면 억울한 마음이 커지고 상대를 미워하게 되지요. 그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성격과 갈등 상황에서 반응하고 처리하는 자신의 특성을 잘 알아차려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 분이 어린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거예요. 이혼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의 부모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해야 해요. 그게 부모이고,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이해하면 잘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장점도 있을 거예요. 용기를 내 사연을 보낸 것처럼 아내에게 먼저 공감하는 걸 연습하고 적용해봤으면 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내려받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