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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이하 초단기계약 급증… 고용불안에 스스로 乙이 된 경비노동자

입력
2021.01.12 04:30
수정
2021.01.12 08:21
9면

<갑질 피해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
계약 끝나거나 용역업체 바뀌면
의지 상관없이 사직서 제출 관행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설자리 좁아
용역업체·입주민 예속 더 심해져
직접고용·장기계약 확대가 해결책
"갑질은 직장 괴롭힘… 입법 필요"

편집자주

택배기사와 경비원, 청소노동자가 스러질 때마다 정부·국회·기업들은 개선책을 쏟아냈다. 금방이라도 해결될 듯 보였지만 그들의 삶이 한 뼘이라도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가 고달픈 현장 노동자들의 삶을 심층 취재했다.


경기 소재 아파트 경비노동자 휴게실 내부 모습(오른쪽 사진). 지하 1층 계단 밑에 문도 없이 이삿짐 상자(왼쪽 사진)로 가려져 있어 걷어내야 드러나는 구조다. 휴게실은 지하라 곰팡이가 슬어있다. 김영훈 기자

경기 소재 아파트 경비노동자 휴게실 내부 모습(오른쪽 사진). 지하 1층 계단 밑에 문도 없이 이삿짐 상자(왼쪽 사진)로 가려져 있어 걷어내야 드러나는 구조다. 휴게실은 지하라 곰팡이가 슬어있다. 김영훈 기자


2020년 12월 31일. 최성국(가명ㆍ73)씨 얼굴엔 희망찬 새해를 기원하는 들뜬 분위기 대신 수심이 가득했다. 3년 넘게 근무한 정든 아파트를 떠나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최씨만이 아니었다. 한국일보가 한 달 동안 인터뷰한 경비노동자 100명 가운데 무려 31명이 이날 계약종료라는 이름으로 해고됐다.

해고된 31명은 모두 지난해 10월 말에서 11월 중순 사직서를 제출했고, 12월에 퇴직처리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언뜻 보면 본인들이 퇴직을 희망하는 사직서를 제출해 그만둔 것처럼 보이지만, 경비원들에게 사직서란 고용연장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이율배반적 문서다. 사직서 제출은 계약기간이 만료되거나 용역업체가 바뀔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적으로 강요되는 업계 관행으로, 해고 여부를 가르는 시발점이다.

고용불안 덫에 옭아매인 경비노동자

사직서 제출의 이면에는 하도급(위탁관리회사) 및 재하도급(경비용역회사) 형태로 이뤄지는 경비노동시장의 간접고용과 1년 미만의 단기계약이 자리잡고 있다. 경비노동자는 3개월마다 재계약을 하면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파리목숨' 같은 신세라, 입주민의 비인격적 대우에도 항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내재화하는 경우가 많다. 위탁회사와 용역회사가 바뀌면 고용승계 여부를 더더욱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최근엔 △최저임금 상승에 따른 경비원 임금 부담증가 △폐쇄회로(CC)TV 등 기계경비 도입에 따른 인원감축 목소리까지 커지고 있어 이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노인 인구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60~70대가 대다수인 경비노동시장의 인원감축은 경비원을 입주민과 용역업체에 더욱 예속시키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아파트에서 6년 동안 근무했던 이모(74)씨의 사직서. 이씨는 관리소장이 세 차례 형식이라며 사직서 제출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제출했다. 이씨는 최근 해고됐다. 김영훈 기자

서울 서대문구 아파트에서 6년 동안 근무했던 이모(74)씨의 사직서. 이씨는 관리소장이 세 차례 형식이라며 사직서 제출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제출했다. 이씨는 최근 해고됐다. 김영훈 기자


나날이 증가하는 간접고용·초단기계약

더욱 심각한 건 경비원들이 입주민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인 초단기계약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와 ‘경기중부 아파트 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접고용과 3개월 이하 초단기계약은 이제 관행을 넘어 일상이 됐다.

강북구는 고(故) 최희석씨 사망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5~6월 아파트단지 60곳에서 317명의 경비노동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안양·군포·의왕·과천 비정규직센터 산하 경기중부 아파트노동자 지원사업단도 지난해 8~11월 아파트단지 326곳을 방문해 2,783명의 경비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강북구와 경기중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접고용 비중은 각각 85.8%와 88.7%에 달했다. 2019년 11월 정부가 공식 발표한 전국 평균 74.6%보다도 10% 이상 높았다. 간접고용은 경비노동자의 낮은 고용승계로 이어진다. 강북구의 경우 용역회사나 위탁회사가 변경됐을 때 전원 재고용되는 비율이 17%에 불과했다. 경비노동자들이 용역회사나 입주민 눈치를 보면서 고용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안정한 일자리를 상징하는 3개월 이하 초단기계약 비중도 급증했다. 아파트단지 경비원 초단기계약은 2019년 전국적으로 21.9%였지만, 지난해엔 강북구가 62.7%, 경기중부는 40.5%에 달할 정도로 크게 늘었다. 강북구는 1개월 단위 '초초단기' 계약도 25.1%나 차지했다. 정의헌 전국아파트 경비노동자사업단 대표는 “초단기계약은 경비노동자의 고용불안을 낳고 갑질 피해에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근로계약기간 설정을 법률로 강제할 수는 없어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 소재의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가 휴게시간임에도 야간 순찰에 나서고 있다. 김영훈 기자

서울 성북구 소재의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가 휴게시간임에도 야간 순찰에 나서고 있다. 김영훈 기자


경비노동자 특수성 감안 간접고용 해소해야

전문가들은 경비노동자의 고용불안 해결책으로 직접고용 및 장기계약 확대를 꼽는다. 안성식 노원노동복지센터장은 "직접고용이 보편화되면 하청·재하청 구조가 사라지는 만큼 고용승계 및 갑질 문제는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라며 "입주민이 직접 고용하는 아파트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일자리안정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론 경비노동자와 장기계약한 업체에게만 일자리안정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일자리안정자금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사업장 부담을 덜도록 인건비 일부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위원은 "최소한 1년 계약을 보장하는 용역업체에게만 선별적으로 지급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입주민들이 직접고용을 선택하도록 조세정책을 잘 운영할 필요도 제기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8월 ‘2020년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주거전용면적 85~135㎡ 아파트의 경우 관리용역 부가세 면제기한을 2022년까지 연장했다. 즉 입주민들이 용역업체를 고용해도 부가가치세를 낼 필요가 없는 만큼, 간접고용 체제가 만연해진 것이다. 강은택 주택관리사 책임연구원은 "입주민들이 위탁업체와 계약할 동기를 없애고 경비원을 직접 고용하게끔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단기계약 문제에 대해선 경비노동자 현실을 반영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현행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법에 따르면 55세 이상은 2년 이상 일해도 근로 연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어 무기계약직 전환이 불가능하다. 경비노동자가 3개월 단위로 10년을 근무해도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故) 최희석씨 같은 갑질 피해를 근절하기 위해선 입주민 갑질 역시 직장 내 괴롭힘으로 간주하는 법률 조항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7월 경비노동자에 대한 입주민 갑질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포괄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우윤근 강북노동인권네트워크 위원장은 "지자체가 조례를 통해 경비원 인권보장 방안을 마련해도 과태료 처분에 불과해 경비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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