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내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입력
2021.01.03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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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나에게 세상은 넓었다. 안 해본 일과 가보지 않은 곳이 너무 많았다. 막연하게 잘하고 싶은 것 또한 많았지만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반면 세상에는 이미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낸 많은 사람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고 환상적인 글을 쓰는 사람, 외국어를 잘 하거나 놀라운 여행을 다녀온 사람,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 등 내가 좇고 싶은 사람은 무궁무진했다.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부럽고 조바심이 났다. 막연히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내년이나 십 년 뒤의 내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내겐 의학과의 엄청난 학습량과 고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몰되기 쉬운 과정이었지만 무난하게 통과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목표라도 세우지 않으면 무색무취의 인생을 살아갈까 두려웠다.

그래서 어느 날, 현실적인 방침을 하나 세웠다. 하루의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보내 내일은 조금이나마 목표에 근접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먼 미래의 목표는 막연했고 오늘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 지금의 하루라도 조금이나마 새롭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했다. 솔직히 나약한 자아의 몸부림이었고 무엇인가 쌓아둔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한 목표였다. 그러나 분명한 동기는 힘이 되었다.

그 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어디든 들고 다니며 활자라면 다 읽었다. 틈날 때마다 아직 만들어보지 않은 요리를 하나씩 만들었다. TV와 스마트폰을 줄인 대신 영화를 한 편씩 보고 감상문을 썼다. 한 주의 발매 앨범을 모두 들었고 생경한 피아노곡을 연습하거나 녹음했다. 짬을 내 중국어 단어를 외우며 항상 다른 나라의 다른 루트를 택해 여행을 다녔다. 병원에서는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논문을 읽었고 종종 달리기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렇게 뭐든 하루에 하나 정도만 달성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살아 왔다.

조금이라도 쌓으면 되는 일이라 그다지 힘겹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전문의가 되었다. 그동안 2,000편이 넘는 습작을 쌓았고 몇 권의 책을 냈다. 일 년이 넘는 배낭여행에서 육로 국경만 30여개를 넘었고 중국에서 무리 없이 생활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냉장고의 식재료를 적당히 요리해서 대접할 수 있었다. 여가 시간에 편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고 달리기 앱의 누적 거리는 2,500㎞가 되었다.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해온 일이 제법 그럴듯해졌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앞으로도 무한할 것이다. 또한 지금의 나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벽에 부닥쳤다고 느낄 때마다 모든 것이 막막했던 옛날을 떠올려본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뜬 내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목표에 근접해진 사람이 되는 일. 우리는 10년 뒤의 나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지만 내일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 일은 할 수 있다. 종착지는 누구나 다르지만 한 발짝씩 수행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새해를 맞아 스스로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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