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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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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한국일보>
2020년의 마지막 날, 올 한 해를 돌아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바뀌면서 모든 어려움과 갈등이 사라지고, 세계가 영점(零點)에서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2020년 12월 31일과 2021년 1월 1일 사이에 실질적이고 유의미한 단절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오늘의 분투는 내일로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내일은 다르다. 1월 1일, 우리는 낙태죄 없는 하늘 아래에서 눈을 뜨게 될 테니까. 모두가 뜨겁게 싸워온 덕분이다. 시민의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지만, 오늘은 서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도 좋겠다. 그렇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새해 선물과도 같은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과거의 불운을 부정하지 않고, 오늘의 열심에 자부심을 느끼며, 내일의 공존을 준비하는 사람, 독일에서 호스피스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인선 선생의 자서전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한 여자의 일생'이다. 책의 발간일도 마침 2021년 1월 1일이다.
김인선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1월 2일,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이미 결혼한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임신을 하게 된 선생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원망했다.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입신양명에 뜻이 있었던 어머니는 자식을 돌보지 않았고, 선생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스물두 살이 되던 해 파독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의지가지없었던 한국 땅엔,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 정착한 독일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간호사가 되었고,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지적 탐구와 신앙의 바탕이 되었고, 깊은 사유로부터 배양되는 영적인 힘은 종교활동과 봉사활동으로 풀어냈다. 그러던 중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과 이혼한다. “나그네”처럼 방황했던 선생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준 평생의 반려자, 수현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화려한 수사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간 일대기는 선생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거짓이 없는 사람이다.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내린 선택이 어느 자리에선가 타인을 살피는 일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인터뷰에서 선생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타인의 삶을 돌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공부건, 일이건, 사랑이건, 그리고 두 차례 선생을 꺾으려했던 병마와의 싸움이건, 문제와 대면하고 모험에 뛰어들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하루 하루는, 오늘도 몇 차례나 주저앉고 싶었던 나의 마음에 물길을 대주었다. 동시에, 그가 순탄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나다움’을 추구해 온 그 길에 독일사회의 차이를 포용하는 문화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제도가 갖춰져 있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낙태죄 없는 하늘 아래, 이제 차별금지법이 들어서야 하는 이유를 또 한 번 읽게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선생이 책의 서문에 적은 문구를 전한다.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나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성내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렇게 나에 대한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켜나갈 것이다. 그것이 곧 세상을 아름답게 이끄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 자신을 아끼고 타인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신축년(辛丑年)의 하얀 소처럼 느리지만 고집스럽게, 우리 모두에게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송구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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