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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손수레 끌며 언덕길로 수백개 배송 "말도 안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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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와 경비원, 청소노동자가 스러질 때마다 정부·국회·기업들은 개선책을 쏟아냈다. 금방이라도 해결될 듯 보였지만 그들의 삶이 한 뼘이라도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가 고달픈 현장 노동자들의 삶을 심층 취재했다.
"여길 매일 혼자 아등바등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지난해 12월 28일 재개발이 예정된 서울 동작구 흑석동 뉴타운구역을 바라보며 우체국 택배기사 남택성(56)씨가 씁쓸하게 말했다. 남씨는 지난해 12월 22일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까지 의식이 없는 한진택배 기사 김중연(41·가명)씨와 배송구역이 겹쳐 호형호제하며 지냈다고 한다. "김씨의 배송구역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기자의 부탁을 받고, 남씨는 휴일도 반납한 채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중연씨는 말도 안 되는 과로에 시달리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며, 김씨가 매일 걷고 뛰었던 그길로 안내했다.
김중연씨의 배송구역은 흑석동 뉴타운구역과 신축 아파트단지, 전통시장(흑석시장) 등이 섞여 있는 난코스다. 마을 입구부터 뒤편 서달산까지는 가파른 언덕에 다세대 주택이 늘어서 택배경력 11년차인 남씨도 "한 시간에 10개를 치기(배송한다는 뜻의 은어) 힘들다"고 손을 내저을 정도다. 골목은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서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고 경사가 높은 탓에 손수레에 짐을 싣고 나르기도 쉽지 않다. 결국 택배를 이고지면서 수십 번 골목을 오가는 수밖에 없다. 쌀이나 절인배추 등이 몰리는 날이면 배로 힘이 든다. 더구나 한진은 택배기사들 사이에서 '똥짐'이라 불리는 고구마, 감자 등 무거운 농수산물 배송이 많기로 유명하다.
뉴타운구역 밑에는 흑석시장이 있다. 바로 김씨가 사고를 당한 곳이다. 시장 안에도 화물차가 들어갈 수 없어 손수레로 짐을 옮겨야 한다. 김씨도 사고 당일 정육점에 고기를 나르다가 쓰러졌다. 남씨는 "시장 상인들이 주문한 고기랑 생선의 무게가 만만찮다"고 했다. 이어서 고층아파트 상가에 있는 김씨의 단골 중식당을 방문했다. 식당 주인 한기호(48)씨에게 김씨가 얼마나 고된 노동에 시달렸는지 들을 수 있었다.
"김중연 기사님이 보통 여기에 몇 시에 왔나요."
"매일 오후 7시? 8시쯤?"
"여기서 저녁을 해결하셨군요."
"그걸... 저녁이라고 하기가..."
"왜요?"
"밥을 하도 허겁지겁 먹길래 '아침, 점심은 먹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그 때마다 '지금이 첫 끼'라고 답해요. 그 친구는 여기 오기 5분 전쯤 전화로 미리 주문해요. 도착하면 바로 음식 나오게 해 달라고."
"중식은 금세 나올 텐데요."
"그 시간도 아까웠던 거죠. 이번에 쓰러졌단 소식 듣고 자꾸 그 생각이 떠올라 더 마음이 아파요.“
"김 기사님은 주로 뭘 드셨나요."
"제일 빨리 먹을 수 있는 자장면, 볶음밥이죠."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수십 번 오르내려야 하는 5층 아파트를 거쳐 또다른 뉴타운구역으로 향했다. 역시 가파른 고갯길에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다. 슈퍼마켓 주인 김희자(43)씨는 "환할 때는 (김씨를) 본 적이 거의 없고 늘 어두워진 후에 왔다"고 말했다. 한 번은 새벽 1시에 가게 앞에 물건을 두고 갔다는 문자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곳 역시 화물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 김희자씨는 골목 입구 저층아파트를 가리키며 "저기에 트럭을 대고 수레를 끌고 올라와 나르는 걸 자주 봤다"고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골목 입구까지는 20미터 이상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김씨의 마지막 배송지인 고층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택배기사들은 이곳에 오면 출입카드를 빌리기 위해 정문 경비실부터 들른다. 경비원 김명길(67)씨는 남택성씨를 보자마자 김중연씨 몸 상태부터 물었다. "아직 의식이 없다"는 말에 그는 "차분하고 성실한 친구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씨는 코스를 돌아본 뒤 "이 구역을 혼자 배송하게 두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일갈했다. 우체국의 경우 남씨와 후배 기사가 절반씩 배송한다. 업계 1위 CJ대한통운의 경우 코스를 잘게 쪼개 여러 명의 택배기사가 배정돼 있다. 그러나 김씨는 하루 평균 300개 안팎의 택배를 홀로 책임졌다. 남씨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물량이 350~400개로 늘자, 평소 내색을 안 하던 김씨도 매우 힘들어했다고 한다.
과로에 기진맥진한 김씨는 자신의 구역을 다른 택배기사와 나누는 '구역떼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 구역이 나뉘면 배송 물량이 적어져 수입이 줄어들지만 김씨에게는 노동 강도를 줄이는 게 더 절실했다. 그러나 결국 후임을 뽑지 못했다. 인수인계를 위해 구역을 돌고나면 모두 두 팔 들어 포기했기 때문이다. 남씨는 "10월에만 기사가 두 번 배치됐는데 모두 1주일 안에 그만뒀다는데, 이런 구역을 혼자 배송하게 두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김중연씨 동생 김미연씨는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했다면 택배회사에서 진작 조치를 취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진은 이에 대해 "배송구역은 집배점(대리점)과 택배기사가 조정해야 할 부분"이라는 입장이다. 택배기사는 택배사가 아니라 업무위탁계약을 한 대리점과 계약을 맺고 있는 특수고용노동자(개인사업자) 신분이라서, 회사 책임은 없다는 의미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으로 "택배기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량이 지속 발생 땐 택배기사의 요구로 물량축소, 배송구역 조정 등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지만 공염불이었다.
한진은 지난해 11월부터 심야배송을 중지하겠다고 밝히며 "오후 10시 이후 배송 여부에 대해 대리점을 통해 매일 점검하고, 심야배송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곳에 대해선 면담 등을 통해 장애요인을 확인해 즉시 근절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김씨는 이후에도 줄곧 살인적인 심야배송에 내몰린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일보가 지난해 11~12월 김중연씨가 고객들에게 보낸 마지막 배송완료 문자시간을 토대로 두 달간 근무시간을 분석해보니 그는 거의 매일 하루 17시간 이상 일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휴일인 일요일과 택배 물량이 평소보다 적은 월요일을 제외하고도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주 평균 87시간씩 일했다. 한진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심야배송을 했던 김씨와 면담한 기록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산상으론 김씨의 심야배송 기록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진택배 기사들은 "오후 10시가 가까워지면 기사들이 배송을 안 한 물건도 스캐너로 일단 배송완료 처리한 뒤 밤새 남은 물량을 배송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전산상 심야노동은 사라졌지만 실제로는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택배기사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스캐너로 배송완료 처리를 하면 고객에게 자동으로 배송완료 문자가 발송된다. 실제로 물건을 받지 못한 고객들이 불안해하는 걸 막기 위해 택배기사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후 시간에 발송하겠다'는 문자를 개별적으로 보내고 있다. 이어 심야배송을 다 마친 뒤 또다시 '택배를 문 앞에 놓고 간다'는 문자를 추가 발송한다. 실제 쓰러진 김중연씨의 휴대폰에도 이런 흔적이 많다.
한진은 "이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일하지 말라는 게 회사의 확고한 방침"이라며 "앞으로 더 철저히 점검해 근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택배기사들은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말한다. 한국일보와 만난 경기지역 한진택배 기사는 "오후 10시 이후 배달을 안 하면 다음 날로 넘어간다. 다음 날 물량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계속 누적되니 대리점은 어떻게든 그날 배송을 하라고 독촉하고 기사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진이 공언한 분류 지원인력 투입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한진은 올해 3월까지 분류지원인력 1,000명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기사들의 '까대기'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취지였다. 까대기는 택배기사들이 지역별로 짐을 분류한 뒤 화물차에 실어 정리하는 업무를 뜻하는 업계 속어다. 오전 내내 까대기 업무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아 택배기사 과로의 핵심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에 따르면 김씨의 일터인 서울 금천구 남서울종합센터물류센터(허브터미널)에는 분류인력이 투입되지 않았다. 김씨는 오전 7시 이곳으로 출근해 5~6시간 동안 까대기를 한 뒤 오후 1~2시 배송을 시작했다고 한다. 남서울센터에 분류인력이 지원됐느냐는 질문에 한진은 "상황이 열악해 긴급한 곳부터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300여명 투입했고 3월까지 1,000명을 투입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택배기사들의 잇단 죽음 이후 업계와 정부가 쏟아낸 개선책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켜진 게 없었다. 김씨의 사고가 예견된 비극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강민욱 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사실상 택배노동자의 심야노동이 은폐된 거나 다름 없고 분류 지원인력 투입이나 배송구역 조정 대책도 실효성이 없다는 게 증명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22일 쓰러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김중연씨는 더 이상 고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못한다. 반대로 요즘에는 김씨의 사고 소식을 접한 고객들의 문자가 쇄도하고 있다. 누구보다 그가 성실했다는 것을 고객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님 제발 아무 일 없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기사님 다음에 방문할 때면 몸에 좋은 것들 챙겨드릴게요. 그렇게 오래 일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기사님 뉴스보고 문자드립니다. 혹시 아니시죠? 걱정되어 연락드려 봅니다.'
'꼭 깨어나셔서 건강 되찾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동생 김미연씨는 메시지를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 없다. "고객들 문자를 보니 오빠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했는지 알 것 같아요. 오빠 죄라고는 뼈 빠지게 일한 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런 일을 당했나 싶네요. 사람이 어떻게 매일 17시간씩 일을 하나요."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작년에 과로로 사망한 택배 관련 종사자는 16명이다. 더 이상 일터에서 죽지 않고 퇴근할 수 있게 해달라는 택배노동자와 가족들의 절박한 호소는 올해도 외면 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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