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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찾아 하루 400㎞ 달려도... 재난지원금까지 부어야 사납금이 채워진다

입력
2020.12.30 04: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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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코로나 1년]? <3·끝> 택시기사 조용석씨


28일 오후 서울역 앞으로 빈 택시들이 승객을 태우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줄지어 서있다. 멀리 보이는 염천교에서부터 서울역 택시승차장까지의 길이는 약 450m. 뉴스1

28일 오후 서울역 앞으로 빈 택시들이 승객을 태우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줄지어 서있다. 멀리 보이는 염천교에서부터 서울역 택시승차장까지의 길이는 약 450m. 뉴스1

‘누가 뒤에서 쿵 박아줬으면….’

손님도 없는 택시 안에 홀로 앉아 긴 신호에 걸려 서있으려니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 가뜩이나 택시기사 중에 경미한 교통사고로 드러눕는 '나이롱 환자'가 많다는 소리가 있어, 욕 먹을 소리임을 잘 알지만 이게 진짜 내 솔직한 심정이다. 시간은 가고, 손님은 없고, 들어오는 돈으로는 사납금도 못 채우는 형편이라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경남 김해시에서 일하는 법인택시 기사 조용석. 신년이면 마흔 다섯이다.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하다 2년 반 전 지금의 택시회사에 들어왔다. 주로 격일제 근무조에 편성돼 회사에서 차를 받아서 몬다. 24시간 근무하는 격일조는 사납금으로 14만4,000원을 내야 한다.

작년만 해도 사납금 채우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14만4,000원을 빨리 만들어 놓고,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버는가가 문제였을 뿐이다. 격일제 근무를 하면 보통 18시간 동안 350~400㎞를 운전한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하루에 30만원 조금 넘게 수입이 잡혀, 사납금을 내고도 20만원 가까이 가져 갈 수 있었다. 한 달에 보름을 근무하니 월 300만원 정도다.

물론 전문직이나 대기업 직원 수입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그 때도 우리 택시기사들은 "힘들다 힘들다"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정말 봄날이었다.


꽃 필 무렵 닥친 ‘겨울’

1월 20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국내에서 첫 발생한 이후에도 여기 김해는 한동안 평화로웠다. 마스크는 안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식당과 주점은 밤 늦도록 붐볐다. 회사에서 넣어주는 LPG 가스 40ℓ로는 모자라 1만~2만원어치를 더 충전해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격일제로 24시간 회사에서 차를 받아와 18시간가량 운전하면 400㎞ 이상을 넘기는 날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 달려도 수입은 예전같지 않다. 조용석씨 제공

격일제로 24시간 회사에서 차를 받아와 18시간가량 운전하면 400㎞ 이상을 넘기는 날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 달려도 수입은 예전같지 않다. 조용석씨 제공

그러나 2월 19일 김해에서 부산으로 출퇴근하는 교사가 김해의 '1번 확진자'가 된 뒤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그가 들렀다는 의원, 약국, 식당 정보가 금세 돌았고, 손님들은 “거긴 피해서 가자”고 했다. 차에 탄 사람들의 경계심이 이 정도면 저 병원 약국 식당은 끝장이 났겠다 싶었다. 코로나19가 진짜 심각한 문제라는 걸 그때서야 실감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넣어 준 가스를 다 못 쓰는 날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다. 사람들의 이동은 뜸해졌고, 택시 수입은 크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3월 신천지 집단감염이 본격화해 1차 대유행으로 접어들자 그나마 있던 손님이 자취를 싹 감췄다. 주말도 주중처럼 손님이 없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했던가. 택시업계의 상도(商道)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손을 든 손님을 보고 우측 차로에 차를 댈라 치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른 택시가 끼어들어 손님을 채갔다. 수입은 줄고 줄어 반토막이 날 때도 있었다. 손님 있을 법한 곳으로 차를 돌려도, 손님은 없고 빈 택시만 가득했다. 회사택시가 사납금 없는 개인택시처럼 죽치고 기다려서는 사납금을 채울 수가 없다. 눈에 불을 켜고 빈 거리를 돌고 또 돌아야 했다.


가뭄의 단비 ‘재난지원금’

주행거리가 늘어도 매출은 오르지 않는 날이 반복될 즈음, 택시 안에선 방향제 대신 락스 냄새가 났다. 마스크 필수 착용, 차량 내부 매일 소독 지침이 시청과 회사에서 내려왔다. 락스를 하도 뿌려 눈을 뜰 수가 없었고, 한낮엔 에어컨을 켠 채로 창문을 내리고 달려야 했다. 손님이 없어 사납금을 생돈으로 채워 넣는 날도 늘어만 갔다. 꽃가루에 기침 한번 하는 것도 어찌나 눈치가 보이는지, 손님이 있을 땐 기침을 참아야 했다. 코 끝은 찡해지고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단비가 내렸다. 긴급재난지원금이 내려왔다. 마침 코로나19 상황도 호전되면서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재난지원금이 든 카드를 들고 거리로 쏟아졌다. 잠시 봄날이 다시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택시기사들의 절규에 사납금 2만원을 깎아주던 회사는 재난지원금을 핑계로 한 달 만에 사납금을 원상복구했다.

김해지역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손님이 크게 줄었다. 손님 찾아 돌고 돌다 지쳐 택시정류장쪽으로 핸들을 돌려 보지만, 빈 택시들로 이미 포화상태다. 조용석씨 제공

김해지역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손님이 크게 줄었다. 손님 찾아 돌고 돌다 지쳐 택시정류장쪽으로 핸들을 돌려 보지만, 빈 택시들로 이미 포화상태다. 조용석씨 제공


손님은 없는데 택시 사고가 유난히 많았던 것도 그 때쯤이다. 반대편에 선 손님을 태우기 위해 불법 유턴하던 택시,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과속하던 택시가 사고를 냈다. 한 회사 동료는 신호대기 중 운전석에서 정신을 잃고 고꾸라져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재난지원금 약발이 다하자 거리는 다시 한산해졌고 머리 위에 '빈차' 램프를 견 택시가 다시 늘었다. 재난지원금을 사납금으로 밀어 넣는 택시기사도 있었다. 이럴 바엔 집에서 쉬는 게 맞지만, 근무를 펑크 내기 시작하면 사납금 빚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기에 푼돈이라도 나와서 벌어야 했다.


택시기사보다 더 힘든 손님들

뉴스에서 식당 사장님들의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폐업을 하려면 목돈이 드니, 손님이 없어도 장사를 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연이었다. 우리 택시기사들도 그랬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자를 줄이기 위해 하루 종일 핸들을 잡아야 했다.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내는 자영업자와, 택시회사에 사납금을 내는 택시기사들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들이 어디 우리 택시기사뿐이겠냐마는, 일을 할수록 내 인생을 적자로 갉아먹어야 하는 이 상황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때 다양한 손님들을 태우면서 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맛에 택시 일을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코로나19 이후로 기껏 타는 손님들도 말수를 줄였다. 입을 여는 손님들의 말도 대부분 우울한 이야기다. 음식점을 하는 한 손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해 가게를 포기했다고 했고, 잘나가던 바이올린 강사는 어디 공장에서 일을 알아봐야 되겠다고 말했다. 노래방 도우미는 정부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한숨을 쉬었고, 한 수출 제조업체 사장은 판로가 꽉 막혀 평생 일군 사업체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며 뒷좌석에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 라디오에선 요즘 서울의 택시기사들이 힘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손님 하나 태웠다는 어느 기사, 직원 절반이 퇴사했다는 택시회사 사장의 이야기. 지방 작은 도시에서 택시 하는 나보다 나을 것 같았던 그들도 힘들다는 얘기를 들으니 ‘뒤에서 쿵 박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싹 달아난다. 다시 시동을 걸고, 손님을 찾아 나서야겠다. 우리 택시기사들에게, 그리고 손님들에게 ‘봄’은 언제 다시 찾아올까.

조용석씨.

조용석씨.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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