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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한파엔 서울대 졸업장도, 토익 900점도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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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6070세대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청년·노년을 사는 첫 세대다. 일자리·주거·복지에서 소외를 겪으면서도 ‘싸가지’와 ‘꼰대’라는 지적만 받을 뿐, 주류인 4050세대에 치여 주변부로 내밀린다. 세대간 공정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외침이다.
최우영(29)씨는 두 평 남짓한 스터디룸에 앉아 네 시간째 미동도 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다. 그가 붙들고 있는 책은 토익 교재. 채점을 마친 교재엔 빨간 동그라미가 이미 가득하지만, 쉴새 없이 밑줄을 긋고 또 긋는다. '토익 고수' 기준이라는 900점은 2019년에 넘었고, 지금 목표는 만점(990점)이다. 900점대 토익으로도 작년 하반기 지원한 20여개 공채에서 모두 낙방했기에, 올해 쓸 이력서엔 '만점 스펙'을 채워넣기로 했다. 영어 공부량을 두 배로 늘렸다.
"솔직히 첫 해에 붙을 줄 알았어요." 최씨의 스펙(취업에 필요한 학력이나 경력)은 이렇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졸업 유예) △인턴 경험 △각종 컴퓨터 자격증 △900점대 토익과 토익 스피킹 점수 등. 그러나 기대와 달리 취업 준비만 4년째. 최씨는 어느덧 '취업 장수생' 길로 접어들었다. 낙방 경험이 쌓일 때마다 최씨는 이력서 빈칸을 채울 스펙을 찾아 도전한다.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쏟고 있는데, 도무지 최씨를 불러주는 회사는 없다. 도대체 지금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물 스펙'을 가졌기에, 이 좁은 문을 척척 뚫어내는 것일까.
최씨와 같은 2030세대가 맞서야 하는 일자리 현실은 40대인 X세대가 경험했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의 고용 빙하기보다 엄혹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 중 △실업자 △추가취업 가능자 △잠재적 경제활동인구를 합쳐 계산한 청년층 확장실업률(고용보조지표3)은 지난해 6월 26.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11월 기준 2030 실업자는 52만3,000명에 달했고, 아예 구직을 포기하며 '쉬었음'이라고 답해 실업자로도 잡히지 않은 2030도 29만1,000명에 달한다.
자포자기한 2030 세대는 "이제 노력으로 취업문을 뚫을 단계는 넘어섰다"고 한탄한다. 서울대에 2009년에 입학해 2019년 졸업한 권모(32)씨도 어느덧 취업 장수생 대열에 합류했다. 공기업에 이어 로스쿨로 목표를 바꿔 잡는 사이 서른을 훌쩍 넘겼다. 서른 둘 나이는 취업 시장에서 단점으로 작용해, 2019년 말부터는 일반기업 공채에서도 서류전형을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권씨는 "사무보조를 뽑는 중소기업에 서류를 넣어봤지만 결국 떨어졌다"며 "깜깜한 상황에 일용직에 지원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권씨는 이 나라에선 해법이 없다고 생각해, 한국 밖에서 일자리를 찾기로 했다. 그는 "코딩을 배우고 일본어를 익혀, 청년층 취업 사정이 괜찮다는 일본에서 웹 개발자로 취업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2019년 서울대를 졸업한 박모(28)씨도 과외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해결하며 2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기소개서 작성, 인·적성검사 풀이, 시사상식 공부로 하루를 다 보낸다. 박씨는 지난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100곳 가까이에 서류를 냈다. 해외 파견 인턴 경험과 러시아어 실력까지 갖췄건만, 여태껏 박씨에게 최종 합격을 알려온 기업은 없다. 필기시험을 본 적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박씨는 "주변을 돌아봐도 합격했다는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취업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의 취업 한파를 피해 창업이나 대학원으로 눈 돌린 청년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소상공인 평균 창업비용은 1억200만원으로, 부모 지원 없는 청년들이 감당할 금액은 아니다.
고려대 재학생 정모(27)씨도 아예 창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탓에 장기간 취업 준비할 상황이 안돼, 기업 공채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고향에서 카페를 창업하려 하지만, 초기 자본금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학교를 자퇴하고 2년간 공사장, 정육점, 공장에서 돈을 모았을 정도로 생활력 강한 정씨지만, 지금 상황은 막막하다. 이미 모은 돈은 등록금과 월세로 써버렸고, 창업을 하려면 다시 수천만원을 모아야 한다.
몇 년 후 사정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대학원에 몸을 맡기기도 쉽지 않다. 대학 졸업생 유모(28)씨는 대학원에 가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유행 이후 계획을 접었다. 지금 대학원을 가봤자 온라인 강의만 들을 게 뻔해, 실속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당분간 유씨는 월세 50만원 외에 사실상 소비활동을 하지 않으며 동면하듯 조용히 죽어지낼 계획이다.
불안감은 고등학생에게까지 전염됐다. 사회 진출을 일찍 하려고 특성화고(예전 실업계고)에 진학한 학생들은 계획에 없던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며 실업을 '유예'하고 있다. 경기의 한 특성화고 졸업을 앞둔 김모(19)양은 "선생님께서 대학 진학을 권유해 급하게 수능을 준비했다"며 "주변에 일자리 구한 친구들이 한두명 밖에 안 돼 일단 대학 가서 기다리려고 한다"고 불안해 했다.
바늘구멍 앞에서 스펙을 쌓으려 배회하는 청년들은 앞선 세대의 무관심과 편견이 취업 준비 생활을 더 괴롭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일보가 만난 11명의 청년들은 "취업을 쉽게 생각하거나, 장수생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큰 상처"라고 말했다. 서울대 졸업생 권씨는 "취업 상담사가 이력서를 보고 했던 첫 마디가 '학교가 이렇게 좋은데'였다"며 "스스로를 탓하게 만드는 시선 때문에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미 자존감을 접고 어디든 들어갈 준비가 된 청년들에게 '눈을 낮추라'는 조언은 가장 현실성 없고 듣기 싫은 잔소리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하향취업의 현황과 특징' 보고서를 보면, 4년제 대학졸업자 30%는 이미 고학력이 필요 없는 곳으로 하향취업을 택했다. 이 가운데 85.1%는 1년 후에도 더 나은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요새 친구들은 '일단 어디든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눈이 낮죠. 눈높이를 탓할게 아니라,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도록 해놓고 정작 충분한 일자리는 만들지 못한 구조를 탓해야죠." 며칠 전 기업 면접을 끝낸 서울대 졸업생 박씨가 기성 세대에 던지는 씁쓸한 취업 준비 체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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