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신축년(辛丑年)이다. 우리말에 “신축년에 남편 찾듯”이라는 표현은 사람이나 물건을 몹시 애타게 찾을 때 쓰는 말이다. 지독한 기근으로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르던 1661년 신축년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현종(재위 1659~1674년) 때의 일이다.
현종의 시대는 정쟁으로 시작해서 정쟁으로 끝났다. 즉위하던 해와 승하하던 해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현종의 아버지(효종)와 어머니가 죽었을 때 할머니(장렬왕후)가 상복을 각각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권력 투쟁이었다.
그 사이의 10여년은 유례없는 고난의 시기였다. 가뭄과 병충해, 기상이변, 전염병이 끊이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 고난의 시작이 1661년 신축년이었다.
그 바람에 현종은 조선의 왕중에서 유일하게 후궁이 없었다. 천재지변과 재난이 끊이지 않는데 왕만 혼자서 후궁을 맞이하는 기쁨을 신하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재난이 일상화됨에 따라 구호물자를 관리하는 진휼청(賑恤廳)이 상설기구가 될 정도였다.
중국의 황제 강희제는 그런 조선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와 같은 공리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여론이 분열되는 것은, 왕권이 허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왕을 능멸하는 신하와 백성들이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비웃었다.
그 무렵 영국에서는 전염병 때문에 왕권이 오히려 하늘을 찔렀다. 청교도혁명의 주역 크롬웰이 전염병으로 죽고 공화파가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외국에 있던 찰스2세가 귀국했다.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는 과거사 정리에 돌입했다. 10년 전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 신하들을 하나하나 참수했다. 크롬웰의 유해는 부관참시했다. 1661년 신축년이었다.
하지만 찰스 2세도 재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공중위생이 지독하게 불량했던 런던에 1665년 흑사병이 창궐(런던대역병)했다. 그래서 시민의 10%가 죽었는데, 이듬해인 1666년에는 런던 시내에 큰 불(런던 대화재)이 나서 템스강변이 숯덩이가 되었다. 나라 안이 이토록 어수선했으니 네덜란드와의 식민지 전쟁에서도 계속 졌다. 유일한 승리는, 북미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 지역을 빼앗아 뉴욕과 월스트리트라는 새 이름을 붙인 것이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과거사 집착이 더 심했다. 영국을 아예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세계로 돌리려다가 민심과 부딪혔다. 결국 3년 만에 명예혁명으로 쫓겨났다. 그때서야 영국이 과거에서 해방되어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왕(윌리엄과 메리)은 중앙은행(영란은행)을 세워 금융제도를 근대화하고, 화폐개혁(1696년)을 단행했다.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지휘로 새로 발행된 파운드화는 19세기 말까지 확고한 기축통화의 자리를 지켰다.
그 무렵 조선도 마침내 자연재해와 전염병에서 벗어났다. 긴 고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았다. 1661년 신축년에 태어난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상공업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곳곳에 시장이 형성되고 대외무역도 크게 늘었다. 상거래가 늘다 보니 상평통보도 다시 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인조 때 시도되었지만, 백성들이 화폐 사용에 익숙지 않아서 곧 사라졌다. 그러나 숙종 때 다시 발행된 뒤부터는 고종이 폐기할 때까지 법화의 자리를 단단히 지켰다.
고종이 상평통보를 폐기한 것은 서양처럼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중앙은행(대한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1901년 신축년에 선포되었는데,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제일은행이 사제(私製) 지폐를 유통시키면서 조직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60년 뒤인 1961년의 신축년에는 군사정변으로 헌정 질서가 중단되기도 했다.
고난과 실패와 충격의 그 신축년이 다시 온다. 그러나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역병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아주 잘 버티고 있다. 지금 거리 두기 노력으로 모두가 힘들지만, 이 어두운 터널도 곧 끝날 것이다. 단합된 노력으로 남은 시련까지 말끔히 떨쳐 버리면, 아마 이런 속담이 만들어져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신축년에 일 풀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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