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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자주운동의 첫 승리, 함평고구마항쟁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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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교수님, 올해는 뭘 심으면 좋을까요?”
“농협과 정부에서 뭐 심으랍니까?”
“고구마요.”
“그러면 고구마 빼고 심으세요.”
이유는 정부가 심으라는 건 과잉생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말에 대부분 동네서 자기만 농사 성공했다면서 감사인사로 농산물을 싣고 왔다고 한 농업경제학자는 회상했다.
"고구마 피해 보상하라!” “고구마는 농민의 인권이다!”
삼엄한 유신치하인 1977년 봄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는 700여명의 농민 등이 기도회를 끝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역사적인 함평고구마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함평군은 전남에서 해남과 함께 꼽히는 대표적인 고구마 산지다. 1976년 농협은 7월부터 고구마를 전량 좋은 가격(포당 1,317원)에 구매하겠다고 선전했다. 출하기인 11월에 상인들이 포당 1,100~1,200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농민들은 농협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농협은 약속과 달리 소량만을 구매했고 고구마는 썩어갔다. 판매시기를 놓친 농민들은 고구마를 포당 200~400원에 처리해야 했다.
당시 유일한 농민단체인 가톨릭농민회(가농)가 중심이 되어 농민들의 피해보상투쟁에 나섰다. 가농 전남연합회 서경원 총무 등이 피해보상대책위를 만들어 농가별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보상투쟁을 격려했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해 조사활동을 계속할 경우 긴급조치로 잡아넣겠다고 협박했다. 경찰, 군청, 농협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20일간의 조사 끝에 159가구가 300여만원의 손해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1977년 1월 함평천주교회에 피해농가와 가농관계자들이 모여 피해 현황을 공표하고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흐지부지하던 보상투쟁은 1977년 봄 광주 계림동성당에서의 기도회를 계기로 동력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협은 여전히 피해보상에 미온적이었다. 1년 뒤인 1978년 장홍빈 지도신부, 서경원, 지역운동가 윤한봉 등 44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 5일째, 농협은 결국 항복을 하고 피해보상을 약속했다. 이어진 정부의 감사에서 농협의 비리가 드러나 관계자 678명이 해임되거나 징계를 받았다. 서 총무는 이후 국회의원이 됐지만, 1988년 통일운동차원에서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것이 밝혀져 감옥에 가야했다.
‘암태도 소작분쟁’에서 이야기했듯, 카를 마르크스는 생산과정이 분업 등으로 집단화돼 있는 노동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생산과정이 개별적으로 분리돼 단결하지 못하고 땅과 전통에 묶여 있어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멕시코·중국·베트남혁명 등 20세기의 여러 중요한 혁명을 농민들이 일으켰다. 순종적인 것 같으면서 불의에 항거해 일어나는 농민이야말로, 시인 김수영의 절창을 빌리자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같은 존재라고 하겠다. 한국의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수탈과 억압에 굴종하고 살아온 농민들은 구한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수백년간 계속돼 온 봉건적 수탈과 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이는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숨죽였던 농민들의 저항은 일제 아래서 암태도 소작투쟁, 적색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해방 후 해방공간에서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이 역시 처절한 패배로 끝나고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농촌은 전혀 다른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농민이 과거와 같은 소작농이 아니라 자기 땅을 가진 ‘자영농’으로 변화한 것이다. 노동을 하지만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진, 소위 ‘프띠 부르주아’로 변한 것이다. 게다가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도시와 달리 농촌사회는 강력한 국가의 공권력이 지배하는 ‘통제의 공간’이었던 만큼, 농촌은 극우여당이 지배하는, 극우정권과 여당세력의 텃밭이었다. 주요 선거에서 도시는 야당을 찍고 농촌은 여당을 찍는다는 ‘여촌 야도’현상이 자리 잡은 것이다.
미국 정부는 농민 보호를 위해 PL(공법)48에 의해 밀가루, 면화, 설탕 등 남아도는 농산물을 구매했다. 이 농산물을 ‘원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제공했고 정부도 싼 농산물정책을 폈다. 면화산업 등이 붕괴했고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많은 가난한 농민(빈농)은 다시 땅을 잃고 도시로 올라와 도시빈민으로 전락해야 했다.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1970년대 들어서 새마을운동이라는, 위로부터 조직한 ‘관제농민운동’으로 농촌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해 갔다.
이런 가운데 일어난 함평고구마항쟁은 ‘극우분단체제’가 최종 봉인된 1953년 종전 이후 처음으로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농민운동이며, 1953년 이후 처음으로 농민이 정부와 농협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점에서 함평고구마사건은 길이 기억돼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8년 농협에서 불량씨감자를 공급받아 농사를 망친 안동농민들이 가농의 도움으로 투쟁해 승리하기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계림동성당에 들어가자 마당에 있던 수녀님이 물었다. “함평고구마항쟁에 대해 글을 쓰려고 답사를 왔는데요.” “이 성당에서 그런 일이 있었나요?” 40년 이상이 흘렀으니 그럴 만하다. 성당을 나서려니 투쟁 중심 중 한명이었던 윤한봉씨의 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1980년 5·18의 마지막 수배자로 군부의 포위망을 뚫고 외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 광주의 희생자들을 생각해 줄곧 맨 바닥에 옷을 입고 자는 등 처절하게 살았다. 민주화 이후 귀국해서도 ‘광주의 죽비’로 ‘민주화 기득권세력’을 향해 외롭게 바른 소리만 하다가 지병으로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함평에 도착해 농협으로 향했다. 농협에는 커다란 하나로마트가 자리잡았고 그 옆에는 현대식 자재창고가 농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협은 경제적 약자들인 농민들이 상부상조의 정신에 기초해 만든 협동조합이다. 그러나 40년 전 함평고구마사건 때도 그러했지만, 과연 농협이 농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는, ‘농민의,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조직’인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중부양.’ 2004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대표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됐고 2008년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남 사천에서 당선돼 화제를 모았던 강기갑 의원이 2009년 1월 국회 사무총장실 책상에서 뛰어오른 장면 때문에 유행한 표현이다. 그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이에 항의해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을 국회사무처가 강제해산시키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농민들은 1976년 함평고구마사건 승리 이후 가농, 기독교농민회 등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싸워 오다가 민주화가 되자 1990년 전국 100여 시군농민회로 구성된 전농을 결성했다. 특히 이들은 농수산물에 대한 (한미FTA 같은) 수입개방에 대항해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한 식량자급형 농업, 농촌환경을 보호하고 국민 건강권을 보장하는 친환경농업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투쟁해 오고 있다. 전농은 노동자의 조직인 민주노총, 빈민조직인 전빈련과 함께 3대 기층민중조직으로 민중운동을 떠받치게 됐고, 자신들의 힘으로 농민대표를 국회에 진출시키기까지 했었지만, 지금은 그 힘이 급속히 약해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노무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 등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체제를 전면화하면서 자동차 등 공산품 수출을 대가로 농업시장을 개방한 탓에 농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이 같은 개방에 저항하다가 박근혜 정부 시절 민중대회에 참석한 농민 백남기씨가 물대포를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 최근 무한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귀농을 하고 있고 농업이 전통적인 농산물생산(1차 산업), 농촌의 유·무형 자원을 활용한 제조가공산업(2차 산업), 관광 등 서비스 3차 산업의 융복합을 통한 ‘6차 산업화’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농촌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2018년 말 현재, 농가는 102만 가구로 전체 가구 중 농가의 비율은 5.2%, 전체 인구 중 농가 인구의 비율은 4.5%에 불과하다. 특히 농촌 인구의 고령화가 심각해 70대 이상이 전체의 32%, 60대 이상이 58%에 이르고 있다. 우리 현대 농민운동의 성지인 함평을 떠나며 나는 물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중의 하나인 농민은 이제 사라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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