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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세대 반복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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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처음 시행된 건 1993년이다. 시험 한 번으로 대입 당락을 결정짓는 게 가혹하니 두 번 봐 더 좋은 성적을 반영하자는 취지로 8월과 11월에 실시했는데 두 시험 난이도 차이가 너무 커 반발이 잇따랐고, 이듬해부터 1회 시험으로 바뀌었다. 새 입시제도로 시험을 두 번 치른 123만 수험생의 박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학 졸업 무렵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취업문이 막혔고 파견근로제가 합법화되면서 비정규직이 대폭 늘었다. 졸업을 유예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례가 늘면서 ‘박사 낭인’도 속출했다. 1998년 3월 명문대를 갓 졸업하고 지방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내 영어 선생님은 자신을 “저주받은 94학번”이라고 소개했다. 몇 년 후 사립인 모교를 찾았을 때 그 선생님이 없던 걸로 보아 기간제로 뽑혔던 것 같다.
올해 수능을 본 2002년생들이 이 94학번과 비교되고 있다. 생애전환기마다 국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은 꼴이란 얘기다.
94학번마냥 새 제도를 처음 겪으며 몸살을 앓았다. 2015년 중학교 자유학기제 도입때 첫 적용대상이 됐는데, 지필고사 안 보고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면서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년’으로 불리는 모멸을 겪었다. 조국 전 장관 자녀 부정입학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입제도가 바뀌었는데, 핵심은 올해 입시부터 주요대학 정시 선발 비중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대부분 대학이 수능점수 100%를 반영하는 정시는 재학생보다 재수생에게 유리하다. 내년부터 또 수능 제도가 바뀌면서 문·이과 통합 문제가 출제된다. 재수하기가 여느 해 보다 만만찮다는 말이다. 이들이 초등 6학년 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수학여행은 당일 견학으로 대체됐다.
특히 감염병이 창궐하며 남다른 학창시절을 겪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2009년 신종플루, 중학교 1학년인 2015년 메르스, 고3인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발했다. 등교개학이 수 차례 연기됐고 각종 대입 일정이 뒤틀렸으며, 사상 처음으로 12월 수능을 봤다.
따지고 보면 두 세대가 겪은 불운의 상당수는 제도 공백이나 오작동이나 잘못된 설계에서 비롯됐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1993년 수능이 그렇고, 외환위기가 그렇고, 세월호 참사가 그렇고, 학년마다 다른 대입제도가 그렇다. 기성세대가 정책 설계만 잘했어도, 설계대로 운영만 멀쩡하게 했어도 겪지 않았을 불운과 혼란이다.
2002년생들의 '남다른 학창시절'은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적용을 고민하는 요즘 절정에 달한 듯하다. 22일까지 대학별 고사를 앞둔 수험생이 수십만인데 코로나19에 확진되면 거의 대부분 대학이 응시기회를 박탈한다. 자가격리 대상자에게 시험기회를 주기로 한 대학들도 대상자가 대폭 늘면 응시를 제한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합격의 기회가 운에 달린 셈이다.
이제라도 올해 수험생들이 예년과 비슷한 기억으로 학창시절을 마감할 수 있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보자. 거리두기라도 지침대로 실천해 이들이 응시 직전까지 불안에 떨게 하는 일을 줄여보자는 말이다. 자기세대를 “저주받은”으로 소개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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