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의 생활 습관이 기이하면 국민들이 힘들다. 지난 10월 한밤중에 열린 북한노동당 창건기념 열병식이 그 예다. 최고지도자가 '올빼미'인 탓에 온 북한 주민들이 고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와 반대로 '얼리버드'였다. 회사원 시절 몸에 밴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습관은 비서들을 고달프게 했다. 국민들까지 덩달아 부지런해야 했다. '새벽형 인간'이라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가운데 2009년 4월 은행들의 문 여는 시각이 9시 30분에서 9시로 당겨졌다.
그 무렵 러시아는 한국에서 영감을 얻었다. 서머타임제(일광절약시간제)를 1년 내내 가동시켜 러시아인들을 자연스럽게 얼리버드로 개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1억5,000만명의 배꼽시계와 생활 습관은 고칠 수 없었다. 세계 유일의 러시아식 '연중 서머타임제'는 성난 민심 속에서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지금 러시아는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름에도 서머타임제가 없다.
통치자와 국민들의 생활시간대는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17세기 스웨덴에서는 통치자의 밤낮이 국민들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서로 불행했다.
스웨덴은 북극에 가까워 겨울에는 아침 9시에도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런데 1632년 즉위한 스웨덴의 왕 크리스티나는 공식 일정을 새벽 5시에 시작했다. 신하들은 왕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사자왕이라 불리던 아버지 구스타브2세가 30년 전쟁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크리스티나는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여자인 크리스티나가 '왕'이 된 이유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남자로 간주된 탓이다.
그런데 10대 소녀가 되자 신하들이 "빨리 결혼해서 아들을 출산하라"며 닦달했다. 크리스티나는 당혹감 속에서 성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다. 결혼 독촉에 염증을 느끼고, 신하들을 피해 한밤중에 '혼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올빼미 생활을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는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자나 예술가들하고만 어울렸다. 그들을 통해 데카르트를 동경하게 되었다. 당대 최고 석학인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었다. 고향 프랑스보다도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교황청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데카르트는 당시 학문적 전통을 깨고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책을 썼다.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네덜란드 군대에 자원 입대해서 개신교도들과 마음을 나눴다. 크리스티나는 관습을 초월하는 데카르트가 어쩐지 자기와 통할 것 같아서 스승으로 초빙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이었고, 아버지 구스타브2세는 가톨릭 세력과 싸우다 죽었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스웨덴 국왕이 가톨릭 신자에게 배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온 국민이 반대했다. 그러나 왕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국빈 대접을 받으며 스웨덴에 도착했다. 그런데 탈이 났다. 크리스티나가 요구하는 새벽 5시 수업이 무리였던 것이다. 그는 항상 점심때쯤 일어나던 저녁형 인간이었다. 군대에서도 그 습관을 바꾸지 못했다. 스톡홀름의 가혹한 겨울날씨 속에서 평생의 습관을 바꾸려던 데카르트는 스웨덴 도착 5개월 만에 폐렴으로 죽었다.
살았을 때 국빈이었던 데카르트의 시신은 허름한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나중에는 해골까지 분실되었다. 크리스티나와 가톨릭에 대한 스웨덴 국민들의 반감이었다. 신하들과 거리를 두고 국민들과 교감하지 못했던 '4차원 처녀' 크리스티나는 28세에 스스로 왕위를 내려놨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남자 복장으로 외국을 전전하다가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녀)가 떠나자 왕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왕 카를10세는 아침 식사 후 맑은 정신으로 신하들을 만나 여러 의견을 들었다. 그중 하나가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금화나 은화가 부족하여 구리판을 돈으로 썼다. 한 개가 20㎏이나 되어 들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1657년 세운 것이 스톡홀름은행이다. 서양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는 파격적인 기관이었다.
올빼미와 얼리버드 생활이 지나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망가진다. 그러므로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이제 동지가 며칠 남지 않았다. 요즘처럼 밤이 길 때는 좀 더 자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길이리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