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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 선고 이후] "판사들, 법대에서 내려와 바뀐 세상을 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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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사법부도 공범이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공분이 거셌던 2020년,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관행이 n번방과 박사방을 키웠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담긴 구호들이다. 미비한 양형 기준과 재판 과정에서의 2차 피해, 초범·반성 등을 이유로 한 기계적 감형 등을 지적한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 확산’이라는 현실, 그러나 변화에 미적대는 사법부를 향한 비판인 셈이다.
n번방·박사방 사건도 ‘온정적 판결’이 나오진 않을까, 여성들은 우려했다. 그래서 법원에 모여들었다. 시위를 열어 엄벌을 촉구했고, 재판에 직접 들어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다.
법원도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소수이긴 해도 판사들 사이에서 디지털 성범죄 재판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어요. 시대 변화를 따라갈 생각과 의지가 있는 판사들은 아직 적지만, 변화의 물꼬는 트였다고 봅니다.” 서울 수원 춘천 대구 제주까지, 전국 법원을 다니며 성범죄 재판을 추적하는 반(反)성폭력 활동가 ‘연대자 D’(이하 D)는 이렇게 말했다. 성범죄 재판 방청과 피해자 지원·교육 등의 활동을 익명으로 하면서 트위터를 통해 현장을 기록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그와 지난 5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D는 지난 10년간 성범죄 사건 재판을 숱하게 지켜봤다. 2010년부터 4년 동안은 성폭력 피해 당사자로서, 이후 6년은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가가 되어 법원으로 향했다. 가해자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야 하는 피해자의 신뢰관계인으로 법정에 동석했고, 때로는 홀로 재판을 방청하며 피해자한테 필요할 정보를 모았다. 의견서·탄원서도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부-검사-피고인’이라는 세 축으로 진행되는 재판에서, ‘소외된 피해자’의 목소리를 되찾는 싸움이었다.
D가 명명한 ‘방청연대’의 활동은 올해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들한테도 빠르게 확산됐다. 텅텅 비었던 방청석에 연대자들이 들어서자 법정 내 공기도 달라졌다. D는 “재판부와 공판검사가 긴장하고, 언행을 주의하는 게 바로 체감됐을 정도”라고 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익명 여성들은 피해자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넘어서, 재판을 기록하고 감시하며 분석했다.
재판 절차에도 점차 변화가 일었다. 피해 사진·영상에 대한 증거조사 땐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하거나, 피해자 증언 시 피고인(가해자)을 퇴정하게 하는 등 ‘피해자 보호’에 신경 쓰는 재판부가 늘어났다. ‘너무 당연한, 그래서 때늦은 조치’로 보일 수 있지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과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법원의 고민도 점차 깊어지고 있다. 작년 12월과 올해 9월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D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다만 “여전히 외부의 관심 유무, 법관 개인의 성인지 감수성·문제의식 등에 따라 재판 절차와 선고 결과에 편차가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게 D의 진단이다. 또, 방청연대라는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서도 법원 내에선 기대감과 거부감이 교차한다. D는 이렇게 말했다. “공개재판을 왜 할까요. 법관도 사람이고, 사법 제도도 결국엔 결함 많은 사람이 운용하기 때문에 외부 감시가 필요합니다. 판사들도 방청 문화에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바꿔 나가야 할 건 아직도 많다. D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재판 과정에서 배제된다는 게 큰 문제”라며 “일단 존재하는 제도와 절차라도 법원이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피해자 의견진술권의 명확한 고지 △증거조사·증인신문 시 피해자 보호 조치 △피해자의 재판 기록물 열람·복사권 확대 △피해자 변호인의 재판 참여 범위 확대 △합의·공탁 과정에서 피해자 의사 꼼꼼히 확인하기 등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10년 동안 D는 변화를 목격했다. 그래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법원을 비판하는 것도, ‘인권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역할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판사들을 향해 그는 “법대에 올라가 있지만 말고, 내려와서 세상을 봐 달라”며 “‘법은 언제나 느리다’는 말로 자위하지 말고, 변화를 따라가며 결국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겐 ‘부디 살아 있으라’는 진심을 건넸다. “늘 말씀드리지만, 살아요. 당신을 위해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말을 하고, 자리를 찾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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