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토요일 격주로 식재료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몰랐던, 식재료를 제대로 대하는 법을 통해 음식의 기본을 이야기합니다.
번역 원고를 다듬다 말고 호두과자를 주문했다. 호두과자는 언제나 그렇다.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느닷없이 생각이 난다. 인터넷을 뒤져 주문을 넣으면 오래 묵은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차여행의 기억이다. 지금은 없어진 장항선을 많이 탔다. 이래저래 거의 유일한 기차여행 노선이었다. 대체로 특급이었던 열차가 천안에 가까워지면 슬슬 호두과자 판매원이 등장한다.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 개수가 늘어나면 호두과자를 원형 용기에 방사형으로 담았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 플라스틱 용기 속에는 하늘하늘한 흰색 습자지에 싼 호두과자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나는 판매원이 오갈 때마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호두과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나 잰 걸음으로 통로를 오가던 그를 잡고 호두과자를 실제로 샀던 기억은 없다. 이유야 들자면 많겠지만, 무엇보다 군것질을 금기시했던 환경 때문이었으리라. 누군가 붙잡아 세우면 판매원은 어깨에 지고 있던 호두과자를 한 상자 내려 팔에 걸치고 있던 비닐 봉지를 펼쳐 담아준다. 보고 또 봐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직접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게 기차가 천안을 지나 판매원들이 나타났던 방식 그대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들을 보고 또 보았다.
물론 호두과자를 전혀 안 먹고 자란 건 아니다. 어쨌든 장항선 위 어딘가에 삶의 기점을 하나라도 두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호두과자와 만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사실 질릴 때까지 먹어 보았지만 적어도 천안을 지나는 기차 안에서는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작아졌군. 호두과자를 받아 들고 또 당시를 기억하다가 새삼 작아진 크기에 정신을 차렸다. 적어도 골프공 크기만은 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사보니 이제는 지름이 거의 500원 동전만하다. 1930년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던가. 아직도 적당한 인기를 누리며 신제품도 곧잘 등장하는 지역빵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끝에 호두과자가 있다. 미국산 호두 8%. 대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창업주 할머니의 사진 바로 옆에 호두의 함유량이 반듯하게 적혀있다.
호두과자의 호두함유량 8%
거의 난립하다시피 하는 지역빵의 세계에서 아직도 호두과자의 입지는 다소 묘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역빵이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아주 자연스레 두 범주로 나뉘었다. 기본은 결국 밀가루와 계란, 유지(마가린 등)의 반죽과 팥소의 조합인 가운데, 첫 번째는 적당한 원형이나 서사만 좇는다. 하회탈이 유명해서 모양을 따라 만들었다거나,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생도너츠를 오랫동안 만들어 팔다 보니 특산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빵들은 맛이 아주 좋거나 특별하지 않을지언정 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괴상할 가능성이 꽤 높다. 첫 번째의 방법론에서 적당히 그쳐도 되는 것을, 지역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한 발짝 더 나가다가 그르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오징어나 생태(가루) 등을 넣은 지역빵이다. 원래 단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 재료를 굳이 더하다 보니 맛이 해괴해진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고로케처럼 짠맛 위주의 빵으로도 만들 수 있을 텐데, 굳이 팥소가 든 빵을 골라 저런 재료를 더한다. 먹고 있다 보면 하회탈이 식품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를 지경이다. 탈을 갈거나 쪼개어 빵에 넣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하회탈 고유의, 해학 넘치는 웃음을 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지역빵의 현실에서, 호두과자는 약간 신기하게도 두 부류의 특성을 동시에 갖추고도 멀쩡한 소수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모양도 호두를 닮은 데다가 반죽에 넣은 과육 덕분에 맛도 호두이다. 물론 애초에 호두라는 재료 자체가 제과에 두루 잘 어울리기 때문이기는 한데, 사실 개선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호두과자가 진정 이름값을 하려면 반죽에 호두가루를 섞어 호두 모양으로 구워야 맞다. 견과류의 가루가 밀가루 대신 빵이나 과자에 흔히 쓰이므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들렌과 더불어 프랑스 구움과자의 양대 산맥인 피낭시에(financier)이다. 반죽의 대부분이 아몬드, 혹은 헤이즐넛 가루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피낭시에라는 이름도 사실 금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었으니 모양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차원에서 차세대 호두과자를 위해 검토해볼 만하다. 호두 알갱이를 적당한 크기로 넣어줘야 맛이 난다고 믿는 시대에 호두과자가 태어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면, 이제는 같은 호두를 쓰더라도 가루를 내 반죽 전체에 골고루 분배해 맛을 내줘도 좋은 시대가 됐다. 적어도 호두 모양을 고수할 계획이라면 그렇다.
고작 8%라니.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이제 호두가 흔한 시대 아닌가. 과자는 됐지만 호두나 더 먹겠다는 심산으로 마트에 갔더니 호두살이 1㎏에 4,950원이었다. 물론 1+1 행사 덕분이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호두는 이제 귀해서 못 먹는 견과류는 아니다. 묵은 할머니의 사진 옆에 가지런히 써 있듯, 이제 호두의 대세는 미국 캘리포니아산이다. 국산 호두가 있기는 있느냐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오기는 하지만 미국산의 10배가 조금 못 되는 가격이다. 아무래도 편하게 먹기는 어렵다.
호두 속껍질 제거법
사실 가격이 싸더라도 호두는 아주 편하게 먹기 조금 어렵다. 속껍질 탓이다. 대부분의 견과류에서 속껍질은 대체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을 적절하게 가하면 과육으로부터 알아서 떨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두의 사정은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 호두의 과육에 굉장히 주름이 많기 때문이다. 이 주름에 순응해가며 호두의 속껍질을 깨끗하게 벗겨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생애 딱 한 번 속껍질을 완전히 벗겨낸 호두의 속살을 먹은 적이 있다. 바로 2017년 서울에 미쉐린가이드가 출범한 이후 계속 별 세 개를 꾸준히 받는 어느 레스토랑이었다. 속껍질을 남김없이 발라냈지만 상처 하나 없는 호두의 흰 속살을 보고는 이게 음식이며 먹는 것이라는 생각도 잠깐 잊고 들여다 보았던 기억이 선하다. 두당 30만원쯤 하는 끼니에서나 바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호두 속껍질 벗기기란 엄청나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따라서 평소라면 참고 먹는 게 좋지만 가끔 정말 쓰고도 뻣뻣해 못 견딜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 호두의 속껍질을 벗겨내는 요령을 간단히 살펴보자. 일단 호두 속살을 삶아서 벗길 수 있다. 끓는 물에 8분쯤 삶은 뒤 건져내 손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식으면 손가락으로 문질러 벗겨낸다. 두 번째로는 오븐에 구워서 벗겨낼 수 있다. 제과제빵의 표준온도인 175°C로 달군 오븐에 호두를 넣고 10분 가량 굽는다. 적당히 식으면 면 행주-표면에 수건처럼 보푸라기가 일어나 있는 게 좋다-에 완전히 감싸 가볍게 문지르면 껍질이 떨어져 나온다.
삶을 때와 달리 구우면 껍질의 부스러기가 많이 나오므로 적당히 벗겨냈다 싶으면 체에 담아 가볍게 쳐 걸러내면 더 좋다. 은근히 귀찮고 손이 많이 가지만 30만원짜리 식사에 낼 건 아니므로, 호두가 적당히 부스러져도, 껍질이 적당히 남아 있어도 크게 상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껍질을 벗겨낸, 특히 오븐에 구워 맛과 향을 끌어낸 호두라면 금방 산패될 수 있으므로 며칠 먹을 거리만 조금씩 손질하는 게 좋다. 어차피 귀찮고 지겨워서 많은 양을 다룰 수도 없을 것이다.
다진 호두 요리
속껍질을 벗기든 안 벗기든, 호두는 웬만한 음식의 틈새에 원만하게 자리를 잡으면서도 고소한 자기 맛을 분명히 낸다. 그래서 굳이 어떻게 먹는 게 좋다고 많은 훈수를 둘 필요 없는 가운데, 틈새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것 같은 쓰임새를 두 가지 골라 보았다. ‘호두를 이렇게도 먹는구나’라고 생각할 만큼 낯설 수도 있지만 재료는 전부 낯익은데다가 조리도 복잡하지 않아서 원래 알고 있던 호두의 틈새를 단박에 넓힐 수 있다. 또한 각각의 레시피에서 동물성 재료를 빼면 채식 식단에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호두 소스]
4인분
준비: 25분
호두 250g
올리브기름 4큰술
크림 2큰술
소금과 후추
호두를 대접에 담아 끓는 물을 붓고 덮는다. 3분 두었다 건진다. 만질 수 있을 만큼 식으면 문질러 껍질을 벗겨낸다. 호두살을 다져 대접에 담고 올리브기름과 크림을 더한다. 소금과 백후추로 간한 뒤 고르게 섞는다. 생 페투치네나 삶은 당근 등에 곁들인다.
[셀러리와 호두 샐러드]
4인분
준비: 25분
셀러리 120g, 다듬는다
사과 1개, 껍질 벗기고 씨 발라 깍뚝 썬다
레몬즙 1개분, 거른다
그뤼에르, 에멘탈 등 반 경질 치즈, 깍뚝 썬다
깐호두 50g, 다진다
올리브기름 5큰술
소금과 후추
셀러리 줄기를 길이로 반 갈라 얇고 길게 썬다. 셀러리와 사과를 샐러드 대접에 담아 레몬즙 절반을 더한다. 치즈, 파슬리, 호두 절반을 더한다. 올리브기름과 남은 레몬즙을 거품기로 휘저어 섞어 종지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간한다. 남은 호두를 섞고 드레싱을 샐러드에 끼얹는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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