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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부터 다른데...'삼성퇴'도 중화 문명? 애교로 봐준다

입력
2020.12.05 10:00

<54> 베이징 문화여행 ⑥ 국자감과 환락곡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의 청동기 유물. 삼성퇴(三星堆) 문명은 약 5,000년 전 청동기문명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중국 고대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최종명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의 청동기 유물. 삼성퇴(三星堆) 문명은 약 5,000년 전 청동기문명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중국 고대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최종명

원·명·청 왕조의 수도였던 베이징, 최고학부 국자감을 찾아간다. 내성의 안정문(安定?) 부근에 공자 사당인 공묘와 붙어 있다. 입장권을 사면 두 곳을 함께 본다. 한나라 무제는 대일통(大一?)을 선포하고 공자 사상에 기반한 왕도정치를 추구하며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송나라 이후에는 국교나 다름없었다.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원나라도 1306년 국자감을 세우고 인재 발굴의 요람으로 삼았다.

황제가 직접 강의하는 대학, 국자감 벽옹

국자감과 공묘가 위치한 거리. '성현가' 패방이 있다. ⓒ최종명

국자감과 공묘가 위치한 거리. '성현가' 패방이 있다. ⓒ최종명


국자감 ‘환교교택’ 편액의 유리패방 ⓒ최종명

국자감 ‘환교교택’ 편액의 유리패방 ⓒ최종명


국자감 유리패방 뒷면의 ‘학해절관’ 편액. ⓒ최종명

국자감 유리패방 뒷면의 ‘학해절관’ 편액. ⓒ최종명

성현가(成?街) 패방을 지나면 바로 국자감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고 한산한 거리다. 국자감은 1961년부터 전국중점문물로 보호되고 있다. 라이터와 성냥을 단속하는 검색대를 통과한다. 집현문과 태학문을 지나면 아름다운 유리패방이 나타난다. 청나라 건륭제 때 세웠다. 기둥과 기와를 유리(琉璃)로 감싸 휘황찬란하다. 건륭제 친필 환교교택(????)을 앞면에, 학해절관(?海??)을 뒷면에 새겼다. 패방 뒤편 벽옹(?雍)으로 가는 다리와 해자를 흐르는 물을 비유했다. 끊임없이 학문에 전념하라는 뜻이 담겼다.

국자감의 벽옹, 황제가 직접 강의하는 학궁이다. ⓒ최종명

국자감의 벽옹, 황제가 직접 강의하는 학궁이다. ⓒ최종명


건륭제는 국자감 벽옹의 보좌에 앉아 강의를 했다. ⓒ최종명

건륭제는 국자감 벽옹의 보좌에 앉아 강의를 했다. ⓒ최종명

벽옹은 주나라 천자가 설치한 대학의 이름이었다. 고대부터 통치자가 벽옹에서 강의를 했다. 황위에 오른 지 49년이나 지난 1784년에 건륭제가 건축했다. 학생 앞에서 경전을 설법했다. 해자 바깥 잔디에서 수백 명의 학생이 강의를 들었다. 황제가 벽옹 안 황금 보좌에 앉아 강의를 하면, 신하 한 명이 목청 높이 외쳤다. 모든 학생이 들을 수 있었다. 신하들이 보기에 70세를 훌쩍 넘긴 황제는 ‘위험’했다.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유교 경전에 해박한 대학사를 통해 오류 없이 제대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학생들은 국자감 벽옹의 해자 바깥에 앉아 황제의 강의를 들었다. ⓒ최종명

학생들은 국자감 벽옹의 해자 바깥에 앉아 황제의 강의를 들었다. ⓒ최종명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황제의 학식에 존경심이 우러났을 듯하다. 최고학부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과 관리로 출세하려는 의지에 불타 열심히 경청했을 것이다. 시위들은 물샐 틈 없이 황제 보호에 전념했다. 황제의 옥음을 전해 들으며 조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벽옹이 생기기 전에는 뒤에 있는 이윤당(??堂)에서 강의를 했다.

국자감 이윤당(빨간 건물) 옆의 회화나무. 다시 소생해 '복소괴'라 부른다. ⓒ최종명

국자감 이윤당(빨간 건물) 옆의 회화나무. 다시 소생해 '복소괴'라 부른다. ⓒ최종명

이윤당 옆에 회화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황색 유리까지 두르고 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원나라 시대 국자감 제주(祭酒ㆍ최고학부의 교장)이자 대학사 허형이 직접 심었다. 500년이 지나 고사 상태였다. 건륭 16년에 친모인 자녕태후의 회갑을 즈음해 갑자기 가지가 부드러워지더니 푸른 잎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시 소생했으니 복소괴(??槐)로 불렸다. 대학사가 공묘에 제례를 왔다가 시와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바쳤더니 크게 기뻐했다.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국자감의 산증인인 셈이다.

국자감 동쪽 과거박물관, 스승과 학생이 문답으로 공부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최종명

국자감 동쪽 과거박물관, 스승과 학생이 문답으로 공부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최종명


국자감 과거박물관에 청나라 동치제 7년(1868) 4월의 과거 결과를 알려주는 방이 걸려 있다. ⓒ최종명

국자감 과거박물관에 청나라 동치제 7년(1868) 4월의 과거 결과를 알려주는 방이 걸려 있다. ⓒ최종명

이윤당을 비롯해 국자감에는 여섯 개의 건축물이 있다. 동쪽 건물은 현재 과거박물관이다. 역대 왕조가 어떻게 과거를 활용했는지, 과거에 오른 인물 등 과거에 관한 내용이 전시돼 있다. 국자감에서 스승과 학생이 문답하는 장면이 모형으로 제작돼 있다. 과거 시험을 치르는 모습도 있다. 동치제 7년(1868) 음력 4월에 치른 과거 결과를 보여주는 당시 방(榜)을 그대로 재현했다. 성적 순서대로 작성된 명단에는 출신 지역도 함께 기록했다.

국자감과 공묘 사이 통로에 '건륭석경' 비석이 빼곡하다.ⓒ최종명

국자감과 공묘 사이 통로에 '건륭석경' 비석이 빼곡하다.ⓒ최종명

국자감과 공묘 사이에 통로가 있다. 유교 경전 13부가 새겨진 비석이 빼곡하다. 역경·서경·시경·주례·예기·좌전·논어·맹자·효경·공양전·곡량전과 이아까지 63만자를 새긴 십삼경각석(十三?刻石)이다. 건륭제의 업적이라 ‘건륭석경’이다. 갈 때마다 비문의 글자를 자세히 본다. 손때가 묻어나고 땀내가 풍긴다. 또박또박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정을 쏟은 석공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공자 사당이 '대성전'으로 통일된 이유

숭성사에서 유교 체험을 하고 있는 중국 어린이들.ⓒ최종명

숭성사에서 유교 체험을 하고 있는 중국 어린이들.ⓒ최종명

통로를 지나 숭성사(崇?祠)를 찾는다. 공자 아버지인 공흘(孔?) 사당이다. 노나라 양공 시대 대부로 자(字)가 숙량(叔梁)이어서 숙량흘이라 부른다. 여름 방학에 가면 ‘공자님 말씀’을 배우는 체험 학교가 열린다. 유생처럼 옷을 입고 붓글씨를 쓰기도 한다. 한여름 8월 초에 한국 초등학생을 데리고 베이징 문화여행을 몇 번 갔다. 그때마다 봤으니 자주 체험이 열리는 듯하다. 대성예악(大成??) 공연도 열린다.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학이’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학이’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복혜’ 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복혜’ 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관저’ 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관저’ 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대동’ 편. ⓒ최종명

숭성사 대성예악 공연 중 ‘대동’ 편. ⓒ최종명

대성예악은 약 15분 동안 진행된다. 공자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대로 악을 통해 예와 도를 구하는 춤과 노래다. 서막이 유붕(有朋)이다. 전각 문이 열려 연주가 시작되고 환영 인사를 한다. 학이(?而)로 넘어가면 선비 차림으로 죽간을 들고 춤을 춘다. 논어를 음악과 무용으로 배우는 공부다. 복혜(福兮)는 여성의 군무다. 관저(?雎)는 시경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다. 무희 혼자 춤을 추다 반주하던 총각이 함께한다. 마지막으로 예기에 담긴 교리인 대동(大同)에 이르면 공자에게 제례를 올리는 춤을 춘다. 짧은 공연이지만 고요한 사당을 휘감아 울리는 악기 소리가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빠르지 않고 느릿느릿, 부드러운 선율을 따르는 옷자락에도 품위가 느껴진다.

공묘의 정전인 대성전의 ‘만세사표’ 편액 ⓒ최종명

공묘의 정전인 대성전의 ‘만세사표’ 편액 ⓒ최종명

앞쪽에 공묘 대성전이 있다. 국자감과 함께 원나라 시대 처음 세웠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며 여러 차례 중건했다. 1906년 광서제 때 이중 처마로 확장했으나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완공하지 못했다. 1916년 민국 시대에 준공해 지금에 이르렀다. 건물 밖에 만세사표(万世?表) 편액이 걸렸다. 강희제가 취푸에 있는 공묘를 방문해 공자 64대손 공상임으로부터 대학 강의를 들었다. 황제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화답했다. ‘만세에 빛나는 귀감’인 공자에 대한 존경이었다. 이 필체는 전국에 있는 대성전의 공자 신위 위에 대부분 진열됐다. 베이징 대성전에는 왜 바깥에 걸렸을까? 사연이 있다.

베이징 대성전 실내 정면에는 ‘도합대동’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베이징 대성전 실내 정면에는 ‘도합대동’ 편액이 걸려 있다. ⓒ최종명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보이는 도합대동(道洽大同) 편액 때문이다. 강희제를 시작으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까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모두 편액을 하사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위안스카이에 이어 권력을 장악한 북양군벌의 지도자 리위엔훙은 대성전의 편액을 다 철거했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가 된 양 ‘도(유교)를 통해 대동 세상을 두루 퍼지게 한다’는 뜻을 담아 글씨를 썼다. '만세사표'가 있던 자리에 자신의 편액을 걸었다. 1983년 공묘를 대외에 개방을 하면서 황제 8명의 친필 편액은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았지만, '도합대동'은 따로 걸만한 위치가 없었다. 북양군벌의 역사를 뗄 수 없었다. 리위엔훙의 친필은 그대로 두고 강희제의 편액을 바깥 1층 처마 밑에 두기로 했다.

공묘 대성전 실내에 제공 의식을 위한 희생 동물인 양, 소, 돼지 조각상이 있다. ⓒ최종명

공묘 대성전 실내에 제공 의식을 위한 희생 동물인 양, 소, 돼지 조각상이 있다. ⓒ최종명

1104년 송나라 휘종이 맹자에 나오는 ‘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集大成)’을 인용했다. 옛 성인의 교훈을 모아 크게 완성했다는 뜻으로 공자의 상징이 됐다. 조서에 따라 공자 신위가 위치한 전각은 모두 대성전(大成殿)이 됐다. 양쪽 벽에 제자와 후학 12명인 공문십이철(孔?十二哲)의 신위도 있다. 양과 소, 돼지가 나란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제공 의식을 위한 희생 동물 조각상이다. 제문을 읽는 명찬(??)이 의식 중 하나인 예모혈(?毛血)을 주재하면 땅바닥에 세 동물의 피를 뿌려 제지(祭地)했다.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편경. ⓒ최종명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편경. ⓒ최종명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박종(왼쪽)과 건고. ⓒ최종명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박종(왼쪽)과 건고. ⓒ최종명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어(?). ⓒ최종명

공묘 대성전에 전시하고 있는 제례 악기 중 어(?). ⓒ최종명

예악에 사용하는 악기도 전시해 놓았다. 강희제와 건륭제 시대에 제작된 진품이다. 7줄인 금(琴)과 25줄인 슬(瑟)이 나란히 놓였다. 편종과 편경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종은 청동으로, 경은 돌로 만든다. 한 칸에 양쪽으로 8개씩 두 줄로 걸린 돌이 음을 만들어 낸다. 종은 두 칸에 위아래로 8개씩 걸려 있다. 1개짜리인 박종과 박경도 있다. 북인 건고(建鼓), 연주를 시작하는 축(?)과 마치는 어(?)도 있다. 어는 호랑이 모양이다. 연주를 마칠 때 죽통으로 엉덩이와 등에 있는 목판인 저어(??)를 3번씩 친다. 소리가 궁금해 치고 싶어진다.

대성문 앞에 공자행교상 앞에 관람객이 몰려 있다. ⓒ최종명

대성문 앞에 공자행교상 앞에 관람객이 몰려 있다. ⓒ최종명

공묘를 빠져나온다. 대성문 앞에 공자행교상(孔子行?像)이 있다. 당나라 화가 오도자의 그림으로 만들었다. 원본은 유실됐고 취푸에 있는 석각본은 국보다. 오도자는 화성(?聖)으로 존경받는다. 그의 화풍인 오대당풍(????)은 천상의 품격을 지녔다고 평가되며, 둔황 막고굴 벽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양손을 가슴까지 올린 단정한 모습과 멀리 바라보는 시선, 왼쪽 겨드랑이에 낀 보검까지 드러나 있다. 반의반 정도 우향우(右向右)한 원본에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보검을 그렸다.

화려한데 꺼림칙...베이징 대표 문화공연 '금면왕조'

베이징 동남쪽 사환 부근의 환러구에 있는 '금면왕조' 공연장 입구 ⓒ최종명

베이징 동남쪽 사환 부근의 환러구에 있는 '금면왕조' 공연장 입구 ⓒ최종명

공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동사환남로(?四?南路ㆍ고리 형태로 이환부터 육환까지 외곽순환도로)에 테마파크인 환러구(??谷)가 있다. 동쪽 입구 화교성대극원(??城大?院)에서 매일 두 차례 ‘금면왕조(金面王朝)’ 공연이 열린다. 여행을 다녀간 사람치고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2007년 8월 첫 공연 이후 베이징을 대표하는 공연으로 정착했다. 베이징에 거주하고 문화여행을 동행한 탓에 몇 번 봤다. 보면 볼수록 웅장하고 화려한 스케일에 감탄한다. 다소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세계 제9대 기적인 삼성퇴(三星堆)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자랑질 때문이다.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 ⓒ최종명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 ⓒ최종명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의 청동기 유물 ⓒ최종명

쓰촨성 광한에 있는 삼성퇴박물관의 청동기 유물 ⓒ최종명

삼성퇴박물관은 쓰촨성 광한에 있다. 1930년대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1980년 이후 본격 발굴을 시작했다. 약 5,000년 전 문명으로 옥기와 석기도 출토됐지만, 청동기 유물이 많다. 부리부리하고 툭 튀어나온 눈, 넓은 입과 큰 코는 전혀 중원의 모습이 아니라 학자들은 당황했다. 인도양의 조개 수천 개가 나왔다. 조각상의 형태는 마치 마야문명을 연상하기도 한다. 생필품과 문자 흔적이 없어 수수께끼 문명으로 치부됐다. 143cm 길이의 금 지팡이와 가면도 발굴됐다. 금면왕조 공연의 모티브로 등장했다. 중국 학계는 중원 사람이 이주해 토착 세력과 융합한 문명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갑자기 전쟁 혹은 자연재해로 인해 성곽이 무너지고 주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알 수 없다.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공연은 흥미진진하다. 금면여왕 부족과 남면왕 부족이 전쟁을 한다. 금장을 들고 모계사회를 상징하는 금면여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면왕을 포로로 잡는다. 전쟁 후 평화로운 시기가 온다. 뽕나무에 녹음이 우거지면 누에를 치고 계곡에는 물고기가 뛰어논다. 항복한 남면왕이 주도해 통천신수(通天神?ㆍ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나무)를 제조한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4m 높이의 청동 신수를 상징한다. 위아래로 용수철을 타고 오르내리는 서커스가 등장하는데 박진감이 넘친다. 어딘가에서 베낀 듯한 느낌도 든다.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신수가 완성되자 금면여왕은 축제를 연다. 다른 부족까지 함께하는 한바탕 잔치다. 살아있는 공작을 머리에 이고 나온 아가씨들이 흥겹게 분위기를 이끈다. 남면 부족의 총각도 춤을 추며 즐긴다. 금면여왕과 남면왕은 사랑에 빠진다. 약간 식상해도 두 줄을 묶고 빙빙 도는 장면은 연인의 모습이다. 행복도 잠시, 폭풍 소리가 아수라장으로 만들더니 홍수가 났다. 무대로 쏟아져 내리는 물의 양이 엄청나다. 앞에 앉으면 옷이 젖을 정도다. 금면여왕은 남면왕에게 권력의 상징인 금 지팡이를 넘겨주고 홍수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다.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화려한 '금면왕조' 공연.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금면왕조' 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무대의 '금면왕조' 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최종명

금면여왕의 희생으로 홍수가 잠잠해졌다. 남면왕은 북을 울리고 제천 행사를 열고 금면여왕을 그리워한다. 여왕은 한 마리 아름다운 태양조(太??)로 변화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파란 하늘이 펼쳐진 고향으로 돌아온다. 천지만물이 풍요롭고 자자손손 사랑이 넘치는 왕조가 영원하기를 기원한다는 메시지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베이징 환러구 '금면왕조' 공연의 무대인사. ⓒ최종명

베이징 환러구 '금면왕조' 공연의 무대인사. ⓒ최종명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창문에 반사된 안내문이 보인다. 거꾸로 보이는 글자처럼 금빛 가면을 쓴 삼성퇴 유물도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금면동인두상(金面?人?像)이다. 삼성퇴박물관을 찾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공연을 볼 때마다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유물의 가치를 생각하면 ‘중원 문명’에 대한 자랑은 그냥 애교로 봐줄 수 있으리라.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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