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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에서 복원가로...나는 '미술품 치료사' 입니다

입력
2020.12.04 04:30
19면

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아를 '노란 집'의 자기 침실을 그린 그림을 세 장이나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아를 '노란 집'의 자기 침실을 그린 그림을 세 장이나 남겼다.


항상 궁금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그림 가운데 ‘침실’이 있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이로 살았던 고흐가 처음으로 정을 줬던 프랑스 아를 ‘노란 집’의 자기 침실을 그린 그림이다. 고흐는 여러 사정으로 같은 방을 그린 그림을 세 장이나 남겼다(1888년, 1889년, 1889년). 그런데 그 그림에 묘사된 침실 구석구석의 색깔이 모두 다르다.

어느 그림이 고흐의 진짜 침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까? 이렇게 색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 답답했었다. 진실은 뜻밖이었다. 130년 세월이 흐르면서 애초 고흐가 그렸던 그림의 색깔이 제각각 달라진 것이다. 애초 고흐가 그렸던 침실 그림의 색감은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과 아주 달랐다.

파랑에 가까워 보이는 벽의 색깔은 애초에는 파랑과 빨강을 섞은 보라색이었다. 보라색을 만들 때 썼던 빨간색 물감이 오랜 햇빛에 퇴색되면서 지금의 파란색만 남았다. 고흐가 빨간색으로 그렸던 바닥도 빛바랜 갈색으로 변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세 점의 침실은 고흐와 시간의 공동 작품이다.

김은진의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생각의힘 펴냄)는 이렇게 흥미로운 사실로 가득한 놀라운 책이다. 저자는 국내에서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숫자가 적은 보존가 혹은 보존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보존가 혹은 보존 과학자는 쉽게 말하면 ‘미술품 치료사’다. 미술품을 치료하는 일이 낯설 수 있으니 설명을 해 보자.

렘브란트가 애초 그린 '야간 순찰'은 색깔이 변색하여 그림 전체가 어두워졌지만 섬세한 복원을 통해서 애초 화가가 그렸던 빛을 찾았다.

렘브란트가 애초 그린 '야간 순찰'은 색깔이 변색하여 그림 전체가 어두워졌지만 섬세한 복원을 통해서 애초 화가가 그렸던 빛을 찾았다.


그림으로 예를 들어 볼까. 그림이 화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그림은 변하기 시작한다. 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를 비롯한 이물질이 그림에 쌓인다. 애초 그림을 그릴 때 썼던 물감을 비롯한 다양한 색깔의 물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당연히 화가가 애초 썼던 색깔도 바뀐다.

있어서는 안 될 손상이 생기기도 한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야간 순찰(Night Watch)’(1642년)이 겪은 수난 사례가 책에 나온다. 1975년의 어느 날,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던 한 관람객이 숨겨 온 빵칼로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치료하는 사람이 바로 복원가 혹은 복원 과학자다.

‘야간 순찰’ 이야기를 꺼냈으니 상식도 바로잡자. 이 그림은 애초 렘브란트가 낮에 활동하는 순찰대를 그렸던 그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색깔이 변하여 그림 전체가 어두워졌다. 1940년대에 섬세한 복원을 통해서 ‘야간 순찰’은 애초 화가가 그렸던 빛을 찾았다. 그러니 ‘야간 순찰’은 사실 ‘주간 순찰’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반대로 그림이 밝아져서 문제가 된 사례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구본웅이 친구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1935년)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속 이상은 “구릿빛 얼굴에 새빨간 입술을 가진 건강한 청년”이다. 하지만 애초 구본웅의 그림 속 이상은 병색이 짙은 창백한 지식인이었다. 그림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화가가 의도했던 색감이 달라진 것이다.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 김은진 지음
  • 생각의 힘 발행
  • 304쪽
  • 1만 7,000원


저자 김은진은 과학고등학교와 카이스트에서 공부했던 과학도였다.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벽화를 복원하는 모습을 보고서 복원가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영국에서 회화 보존을 공부하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 치료사’ 혹은 ‘그림 치료 과학자’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의 보존가가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첫 책이다. 책에 빼곡하게 담겨 있는 보존가가 하는 일, 보존 과학의 세계를 소개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미술관이나 도판을 통해서 접하는 예술 작품이 지금과는 다르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다시 고흐의 침실 얘기로 돌아가자. 노란 집의 그 침실 벽은 진짜 보라색이었을까? 답은 100쪽에 있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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