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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꿈 위해 '신의 직장'도 버리고 미국까지 날아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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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조종사는 누구나 한번 쯤은 꿈꿔 본 직업이다. 공군사관학교나 대학 항공운항과를 졸업하지 않아도 파일럿이 되는 길이 소개되면서 국내엔 약 10년 전부터 항공유학 붐이 일었다. 취업준비생부터 안정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까지, 많은 이들이 창공의 삶을 그리며 유학길에 올랐다. 불과 몇년 뒤 참혹한 현실이 다가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18년 약 1년간 나는 미국 항공전문학교에서 비행을 배우고 오클라호마, 캔자스, 아칸소 등 미 중남부의 하늘을 날았다. 자가용 조종사과정과 계기과정, 사업용 조종사과정을 모두 수료했다.
처음부터 이 길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언론사를 그만둔 뒤 호텔개발사업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비자 문제와 회사 내부사정으로 중단해야 했다. 대안으로 택한 것이 조종사 코스였다. 항공담당 기자시절, 비행과 조종사의 삶을 지켜보며 마음 한 구석에 생긴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은 5년 세월이 흘러 나를 새로운 도전의 길로 이끌었다.
내가 다닌 비행학교는 오클라호마 털사의 리처드 로이드 존스 주니어 공항 안에 있었다. 2018년 이착륙 비행기수는 19만9,000여대로 미국 전체론 60위 정도지만, 오클라호마에선 1위 공항이었다. 비행학교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파일럿 지망생 80여명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절반은 파나마 출신이었다. 7만달러의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지원받는 국비 장학생들이었다. 대만, 한국, 태국 순으로 아시아 유학생들이 꽤 되었고 영국, 나이지리아, 멕시코, 벨리즈 출신도 있었다. 교관을 제외한 미국인은 알래스카에서 온 부녀와 교관 과정 학생까지 5명 남짓에 불과했다. 한국 학생들은 직장을 다니다가 온 30대가 대부분이었고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가 두 명 있었다. 나이차가 많게는 열 살 이상 났지만, 모두 같은 꿈 하나로 1만7,000㎞를 날아온 '동창'이었다.
학교 도착 첫날 연방항공청 지정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마지막 상담진료를 보던 65세의 여의사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서 온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저널리스트인데 왜 에어맨이 되려고 하죠?”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하늘을 날고 싶어서요.”
일주일 뒤 첫 비행을 시작했다. 칵핏(조종석) 안은 프로펠러와 공기저항이 빚어내는 소음으로 무척 시끄러웠다. 교관과 대화하고 관제사와 교신하려면 헤드셋 착용이 필수였다. 헤드셋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소음제거 기능이 탑재된 유명 B브랜드는 1,000달러가 넘었다. “장시간 하늘에서 관제사와 수시로 교신해야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음질 좋은 헤드셋을 사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귀가 일찍 상한대요.” B브랜드 제품을 쓰던 H(34)가 말했다. 저가제품을 샀던 나는 그 말을 듣고 350달러짜리로 바꿨다.
H는 자가용 면장을 따고 계기단계를 밟는 중이었다. 미국 오기 전 경남 거제의 한 대형 조선소에서 일했다고 했다. 입사할 때는 '꿈의 직장'이었지만 2015년 이후 불황으로 구조조정 바람까지 휘몰아치자 지인으로부터 항공유학 이야기를 듣고는 과감히 유학길에 올랐다.
자가용, 계기, 사업용 면장을 취득하려면 각각 학과, 구술, 실기 등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학과시험에 대비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3주 동안 이론수업이 진행됐는데 비행이론, 항공법, 항공기상 등 여러 분야 문제가 무작위로 출제되기 때문에 공부할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간단히 저녁을 먹고 차로 20분 거리의 주립대 도서관에서 자정이 지나도록 공부했다. 대학입시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형, D랑 셋이서 스터디하는 거 어때요?” 학과 수업 시작을 하루 앞두고 W가 내게 물었다. D(33)와 W(36) 모두 공군 출신이었다. 항공사 직원인 W는 과장진급 시험을 미루고 육아 휴직을 낸 상태에서 아내와 미취학 자녀 둘을 데리고 미국에 온 네 식구 가장이었다. 입사 동기 두 명이 미국 비행유학을 거쳐 저비용항공사에 입사해 부기장 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들을 보며 자신도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D는 공군 부사관으로 10년간 근무했다. 정년이 보장된 직업군인을 관두고 유학 온 그의 꿈은 해양경찰 CN-235 조종사다. 공군에서 수송기 정비와 탑재관리 업무를 맡았던 탓에 항공이론 지식이 해박했다. 우리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내가 사는 아파트 식탁에 모여 함께 공부했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D에게 물었고 그는 막힘없이 술술 설명했다.
자가용 조종사 면장을 따기 위한 첫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랜딩이다. 시험을 통과하면 다음날 교관 없이 ‘솔로’ 비행을 한다. 어프로치(approach), 레벨오프(level-off), 플레어(flare), 터치다운(touch-down)으로 이어지는 매 단계를 정확히 수행해야 안정된 착륙을 할 수 있다. 첫 단계에서 불안정하면 다음 단계에서 실수를 만회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랜딩 감각을 익히는 게 상당히 까다로웠다. 어프로치 단계에서 요크(조종간)를 언제, 얼마나 당겨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요크를 너무 일찍 당기면 비행기가 위로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파도에 출렁거리는 보트 안에 탄 느낌인데 이를 '벌룬'(ballooning) 현상이라고 한다. 반대로 요크를 너무 늦게 당기면 프로펠러가 땅에 닿는 사고 위험이 있다. 나는 학생들을 붙잡고 랜딩 비법을 묻곤 했는데, 대답은 늘 똑같았다.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스스로 감을 터득해야 해요.”
그때 자가용 과정 막바지에 있던 Y(33)가 말했다. “다들 무서워서 일찍 요크를 당기니까 벌룬 현상이 생기는 거예요. 어프로치를 활주로 가까이 더 오래 끌고 가서 요크를 잡아당기면 레벨 오프가 자연스럽게 될 거예요.” 늘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의 Y는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5년간 근무했고, 사무장 진급도 했지만 파일럿이 되기 위해 사표를 냈다. 유학 온 사람들 중에는 Y같은 승무원 출신이 꽤 많았는데 아무래도 같은 비행공간에서 장시간 근무하다 보니 조종사에 대한 로망이 커진다고 했다. 나는 다음 비행에서 Y의 조언대로 평소보다 늦게 레벨오프를 시작했다. 비행기가 지면과 수평을 만들더니 거짓말처럼 활주로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6개월 만에 자가용과 계기 과정을 끝내면서 나의 유학 생활은 순조로워보였다. 문제는 사업용 과정부터였다. 깐깐한 교관이 문제였다. 툭하면 고함치고 수업까지 중단하는 교관 때문에 한국과 태국 출신 학생 두 명이 중도 귀국했다. 한 학생은 시뮬레이터 수업 중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 같이 남아서 연습할래요?” 교관과 마찰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L(35)이 제안했다. 그는 원래 항공운항과 지망생이었지만 낙방하는 바람에 다른 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졸업 후 공기업 기술직으로 입사했지만, 어릴 적 꿈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미국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수업 후 매일 두 시간씩 시뮬레이터 연습을 했다.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와 향수병이 금세 사라졌다.
비행학교 바로 옆에 항공 전문 대학에는 유독 중국학생이 많았다. 항공사와 99년 근로계약, 즉 종신계약을 맺고 학비와 숙식비 전액을 지원받고 온 이들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부기장이 된다고 했다. 취업이 보장된 그들이 부러웠다. 교관수업이 없는 날이면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시동 걸고 새벽 비행과 주간 비행 2회, 야간 비행까지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 귀가했다. 주말도 따로 없었다. 우린 모든 게 보장된 파나마나 중국 유학생들과는 달랐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동안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왔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절박했다.
어렵게 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6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일본 불매운동이 끝나기도 전 코로나19가 닥쳤다. 하늘길은 닫혔고 항공사 입사원서를 쓸 기회조차 없었다. 꿈과 열정이 한순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글·사진=이준영 전 YTN기자(한·미 조종사 자격증 보유)
◆글싣는 순서
① 고개 숙인 조종사들
② 늦깎이 항공유학생의 애환
③ 우리는 '비행낭인'이 아닙니다
④ 위기의 항공, 그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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