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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오는 면도기는 이전것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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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한국일보>
친구의 십대 아들은 얼마 전 처음 면도를 했다. 자연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라서 청소년의 턱에 옅은 수염이 나게 했고, 그 애는 수염을 없애고 싶어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면도기를 선물하고 싶었다. 뭔가 과거의 아이템을 전해주고 싶었다.
나는 제 아버지 따라 우리 집에 책 구경 하러 온 아들에게 “있잖아. 예전에는 세상이 아주 장식적이고 여유로웠어” 하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대신 거품을 내 면도하는 펑키한 레트로 도구를 내밀었다. 전통적인 면도법은 번거로운만큼 스타일리시해 보일 것 같았다. 공들여 면도하는 남자의 모습은 늘 그림 복원 작업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어떤 점으로 가장 남성적인 예술은 면도의 비밀 속에 있는지도 몰랐다.
“과학자가 털이 안 나는 마술의 총알을 찾을 때까지 남자는 아침마다 이 의식을 치르는 수밖에 없어. 그럴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멋지지 않겠어?”
나는 마구 생색을 낸 다음 돌발 퀴즈를 냈다.
“그런데 옛날 이발소 앞에 흔히 있던 삼색등이 뭘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
부자(父子) 사이에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15초를 못 기다리고 답을 발설했다. 독서는 늘 잘난 척 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건 피를 의미해. 빨간 색은 동맥, 파란 색은 정맥, 그리고 흰색은 붕대.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로마에선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겸했거든.”
그 아이는 내 선물에 기뻐하는 척 했지만 고등학생의 일상에 거품을 내 면도를 할 여유가 있을까. 조용히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반짝이는 칼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차라리 일회용 면도기나 열 상자 사줄 걸 그랬나.
사실 요즘 면도기들이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았다. 손잡이며 헤드는 울퉁불퉁, 화농된 대왕 여드름 같았다. 나는 최신 또는 첨단 제품이 만드는 새로운 페이소스를 익히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면도기로 세계 남자의 턱을 점령한 회사는 새로 출시한 오중날 면도기를 홍보하기 위해 자사의 예전 삼중날 모델을 흉 보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 삼중 날 삼중 날, 노래하더니 광고에선 태연하게 뒤집었다. “봐요. 확실히 다섯 개가 세 개보다 좋죠?” 그 광고를 보는데 잘 안 드는 칼로 턱이 베이는 것 같았다.
주기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제조 회사의 절박한 공포를 나는 예상 못한 걸까. 믿음을 강요하던 자본주의자가 제 발로 그것을 무너트리는 현실을 야유해야 할까. 그러다간 아무도 자기들을 안 믿게 될 거라는 두려움을 차라리 가여워 해야 할까.
어떤 점에서 새로 나오는 면도기는 그때마다 면도기 산업을 망쳤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처음 발명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면도기 성능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살펴보면 오중날 면도날은 삼중날보다 그렇게 못 하거나 뛰어나지 않았다. 삼중날 역시 이중날보다 그렇게 처지거나 빼어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스테인리스 면도날이 대량 생산된 이후, 지구의 모든 남자가 살을 베지 않고 수염을 깎게 되었다. 동시에 조상들이 고수하던 옛날 면도칼이 싹 사라졌다. 그 후에 나온 수없이 변형된 면도기들은 하나같이 이상하지만 단순한 인생의 진리를 보여주었다. 문제가 해결된 뒤에 더 우월한 해법이 나온다는. 의학도 똑같았다. 과학적인 의학이 나타난 이후에야 의사가 형식적인 절차 외에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군주제의 몰락 이후에 개혁을 생각한 정치의 원칙도 비슷했다. 그러니까 혁신은 새 것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여유가 만드는지도 몰랐다. 잠깐, 그렇다면 경솔함이 발명의 진짜 어머니라는 얘기일까.
생각의 연장선은 새벽 세시에 끊겼다. 사실 조금 피곤해졌다. 그렇지만 아직 책을 덮진 않았다. 다윈주의의 전통은 지형이 척박할 때 더 많은 진화가 이루어졌고, 바다가 잠잠한 지루한 시대에는 지체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진화가 간절함의 스트레스 속에 진행된다는 이론은 좀 편협해 보였다. 나는 치열한 경쟁이 오히려 정체를 부르고 기초적인 편안함이 변화를 만든다는 이론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일찍 일어난 새는 허겁지겁 지렁이를 먹다 지쳐 늙은 아버지 새처럼 낮은 키로 노래하며, 열 시에 일어나 느긋하게 지렁이를 먹는 새는 새로운 노래를 부를 에너지와 시간이 있다니, 진짜 통쾌한 가설이었다. 사냥하는 것으로 몸에 부담을 주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할 게 없던 머리가 뛰놀기 시작한다. 턱이 긴장을 풀면 뇌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생을 설명하는 건 존재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즐거움이 만드는 평온함 아닌가.
여기까지 읽다 보니 인간은 다 삼중날 면도기 같았다. 쓸모 없는 면도날과 필요 없는 배터리로 진동하는, 풍요 속에 만들어지되 (가끔 섹시해 보이는) 낭비 속에 번성하는 존재들.
다음 페이지는, 공작새의 꼬리와 엘크 사슴의 뿔, 열대어의 황홀한 색이며 정교한 비늘이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번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수컷 공작새는 꼬리를 기르며 낭비할 시간이 있었고, 암컷 공작새는 그 꼬리를 보고 “귀엽네”라고 생각할 관대함이 있었다. 공작새의 꼬리, 엘크 사슴의 뿔,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모두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장착한 일종의 여유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로 수컷들이 궁둥이를 실룩실룩, 무념무상으로 자연의 런웨이를 걷는다.)
동물들이 이익을 위해 번식한다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고 반박한 생물학자도 있었다. 자연의 진정함 속에는 경솔한 변형과 상대 성과의 줄타기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짜? 암컷 공작새가 정말 매력적인 꼬리를 찾는다는 증거가 없고 그냥 무작위로 짝짓기 상대를 고른다고? 공작새의 꼬리는 강하고 이기적인 유전자가 아닌 평화로운 사회성의 상징이라고? 뭔가 갸웃했지만 아름답게 태어난 존재들이 생존의 부담 때문에 평범해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분 좋은 생각 같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좋은 것은 나쁜 일의 그늘과 같다. 어떤 때는 친절함과 한가로움이 배신감이나 긴박함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그 시기에 겪는 과정이 훗날 낙심의 열매를 안길까, 환희의 결과로 돌아올까. 자다가 깨어 고민으로 뒤척이는 사람과, 고민 때문에 잠을 설치는 사람은 무엇이 같거나 다를까. 나는 다시 주섬주섬 책을 찾았다.
그 순간, 내가 그동안 무엇으로 책을 읽었는지 알았다. 나는 매일 침대 옆 스탠드 조명 아래서 책을 읽었다. 누군가 애들을 기르고 학비를 대느라 곯아 떨어진 배우자 옆에서 조심조심 책장을 넘길 때 켤 것 같은.
처음 그 조명을 고를 때는 정말 골치 아팠다. 종류도 그렇고 파는 데도 거의 무한대였다. 책의 페이지만 비추고 내 눈에 빛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건 아주 까다로워서 실패의 아리아만 내내 합창을 했다.
어떤 조명은 외계인처럼 긴 목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징그럽게 늘어났다. 펜던트는 일단 눈에 거슬렸다. 벽에 부착하는 브래킷은 정확한 그 지점에 책을 두어야 했다. 전선과 체인으로 매다는 것, 책상 표면을 나사로 고정시키는 것, 3단 조도로 조절하는 것, 핑그르르 돌려 빛의 데시벨을 세밀하게 맞추는 것, 배터리로 켜는 것, 트랜스가 필요한 것. 어느 것도 나에게 꼭 맞지 않았다. 노출된 알 전구도, LED의 가시 광선도, 램프 갓 아래 누그러진 빛도 눈만 피로하게 만들었다
내가 찾은 조명의 다양함은 실패의 다양함이었다. 이야기의 비밀은, 내가 동시에 이 조명들을 사 모았다는 것이다. 결국 창고엔 망가졌거나 방치된 싼 조명이 점점 쌓였다.
그날 밤, 내내 투덜거리다가 신발장에 둔 촛불을 찾아 침대로 가지고 왔다. 하나로는 부족해서 두 개를 켰다. 부드럽고 잔잔한 빛이 페이지를 비추자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촛불은 독서용 조명에 원했던 모든 것을 했다. 책장을 덮을 때 갑작스런 딸깍 소리도 느닷없는 어둠도 없었다. 그저 숨결 하나로 사라진 빛이 남았다.
자비는 여태껏 코앞에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기술은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넘쳐나는 대안들은 다윈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프로이드적이었다. 진화론자들이 뭐라고 하든 풍요는 예전의 우아한 방책들을 가로막는지도 몰랐다. 원초적인 진실을 덮기 위해 고안된 알리바이와 변명으로서.
그날의 이야기는 4억 년 전 등장한 불가사리로 마무리 짓겠다. 불가사리는 진화론을 다룬 요즘 생물학 책에 자주 카메오로 출연한다 사람들은 개구리의 멸종이나 벌의 실종을 걱정하지만, 산호초에서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불가사리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한다. 불가사리는 삽입이나 탈진으로 번식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가까이 가서 생식 세포를 뿌리고는 세포들이 섞이고 수정되길 바랄 뿐이다. 즉, 쇼윈도 부부처럼 가짜 친밀함만으로 번식한다. (연애의 귀찮은 과정을 생각하면 솔직히 인간도 그랬음 좋겠다)
자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면, 불가사리는 엄청난 뿔을 가진 엘크 사슴이나 색색의 꼬리를 가진 공작새보다 성공한 개체 같다. 모두가 그토록 목숨을 거는 인간 남녀 포유류보다도.
내가 배운 것은, 자연은 풍요로움에 초과 요금을 매긴다는 것이다. 풍부함 속의 다양함은 재앙이 닥치면 힘을 잃는다. 공작새 꼬리와 진동하는 배터리들이 죽어갈 때 불가사리는 촛불로 세상을 물려받는다. 공작새의 시절은 갔고, 불가사리의 시대가 왔다. 살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에 희망은 새처럼 다시 노래 부르며 꼬리를 친다. 희망에는 우리가 미처 못 본 날개가 있기 때문에.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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