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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판기 속으로 사람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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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중심가에 위치한 이름도 간판도 없는 슈퍼마켓이 있다. 아이스크림, 물, 음료수, 스낵, 햄버거, 따듯한 커피 등 갖가지 간식거리로 가득차 있다. 이 슈퍼마켓의 특징은 모든 제품이 자판기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판매원은 가게 내부에 없다. 이름하여 무인 마켓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마주치는 길거리의 자판기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자판기 마켓은 도시인의 쇼핑 풍경을 바꾸고 있다.
자판기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커지기도 하고, 상상 이하로 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기만 쓸 수 있다면 어디든 설치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전 세계 도시에서 자판기의 존재감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본 간식류와 보관·운반이 간편한 제품들이 주를 이루지만, 자판기 안에 들어가는 물건의 종류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더치커피, 초밥과 피자, 생과일 음료, 컵케이크, 계란, 콘돔 등 성 기구, 휴지, 책, 교통카드, 즉석사진, 행정서류 등은 이제 흔해졌다고 여길 정도다. 아부다비에 있는 금 자판기를 비롯해 최근엔 미용 제품인 립스틱, 마스크팩 등도 자판기 안에 담겨 있다.
특히 중국은 자판기 관련 산업이 2010년부터 해마다 10%씩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 배경엔 간편한 설치와 소비자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장점도 있지만, 중국의 가파른 인건비 상승과 임대료 부담을 꼽는 이들도 많다.
중국은 오래전 부터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고 결제할 때 모바일 페이 방식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자판기 역시 QR코드 시스템을 통해 결제가 가능하게 했다.
선전(深?) 시내에서 오렌지 착즙 주스를 마시기 위해 모바일 결제를 해봤다. 자판기 안에서 바로 오렌지를 짜서 100% 원액이 담긴 음료를 컵에 담아 빨대와 함께 나오는데 딱 3분이 걸렸다. 중국의 대표 기업 알리바바는 곧 자동차를 즉석에서 살 수 있는 자동차 자판기를 내놓겠다고도 한다.
기술력을 통한 자동 판매 방식은 앞으로도 발전하게 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한다. 대형 마트와 슈퍼마켓, 그리고 편의점은 앞으로 하나의 대형 자판기로 바뀌지 않을까. 도시 자체가 자판기로 변한 세상. 어쩌면 그 세상은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로 자판기는 갈수록 똑똑해지면서 사용하기 편리해 지고 있다. 자판기 내부의 제품 수량, 재고 관리, 수익 관리 등을 모바일로 실시간 확인이 가능하게 되면서 자판기 운영의 부가가치도 높아졌다. 자판기의 망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과거보다 적은 인력으로도 효율적 관리가 가능해졌다.
자판기의 기능 개선은 무인 카페, 무인 편의점, 무인 휴게실, 무인 식당 등 공간과 접목되면서 자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병원, 학교, 공장, 휴게실, 길거리, 헬스장, 찜질방, 영화관, 피시방, 주유소, 골프장, 세차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중국에 빙고 박스라고 하는 무인 컨테이너 마켓이 있다. 중국 선양(沈?) 도심의 길을 가다 이 컨테이너를 보자마자, 확대된 자판기 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쇼핑하고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갈 때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QR코드를 인증하면 문이 열린다. 상품을 고른 뒤에도 모바일 페이로 값을 지불한다. 나갈 때는 안면 인식을 해야만 문이 열리고, 이는 도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빙고 박스는 2018년 12월 기준으로 중국 전역에 500여 개가 설치됐다. 빙고 박스에는 문 잠김, 상품 교환 및 환불, 안면 인식, 도난 경고 기술 등 30여 개의 특허 기술이 적용돼 있다.
생김새는 15㎡의(4.5평) 작은 컨테이너 박스 같지만 여기에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핵심 역할을 한다. 상품의 특징을 스스로 익히게 하고 상품 가격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게 하기위해 1,000만 번 이상의 실험과 2,400시간 이상의 학습을 거쳤다고 한다.
나는 상해(上海) 에서 이런 QR 코드로 모든 걸 다할 수 있는 마트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핵마트라고 하는 이름의 이곳은 주로 주방용품과 주방가전을 팔고 있다. 이곳의 진열된 상품들 앞엔 보통 마트처럼 숫자가 적힌 가격표 대신 QR코드가 있었다.
코드를 인식하니 물건의 생산지, 생산자, 크기와 가격, 재고 수량 등 정보를 모바일 화면을 통해 한번에 볼 수 있다. 화면의 장바구니 버튼을 클릭하면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긴다. 모바일에 담는 것이기 때문에 무게와 부피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힘들게 카트를 끌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게 필요한 상품에 대한 쇼핑을 마치면 결제 버튼이 뜨는데, 모바일에서 결제를 할 수 있으니 굳이 계산을 위해 계산대에 서지 않아도 된다. 모바일 계산 뒤에도 소비자에겐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지는데, 현장에서 포장된 물건을 받아 갈 것인지, 집에서 받아볼 것인지다.
현장에서 받아 가려는 이들은 계산대 앞에 마련돼 있는 커피 마시는 공간에서 포장이 다 되기를 기다리면 되고, 집에서 받아 볼 이들은 모바일의 배달 버튼을 클릭한 뒤 그냥 집으로 가면 배달이 된다. 한마디로 장바구니를 일일이 끌고 다니며 장을 보지 않아도 되고, 힘들게 구매한 상품을 옮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 마트는 물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일 뿐, 같은 상품을 진열대에 쌓아놓고 반복적으로 그걸 채워 넣기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직원들은 소비자가 모바일로 체크한 품목을 확인해 포장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이들이 일하는 곳은 진열대 뒤의 창고다. 직원과 고객이 만날 일은 없다. 다만 직접 구매한 물건을 들고 가겠다는 사람만, 출구에서 직원을 만날 수 있다.
상해의 또 다른 마트도 인상적이었다. 2016년 알리바바에서 론칭한 허마셴셩(盒馬鮮生). 말 그대로 신선한 하마를 뜻하며, 신선하고 살아있는 제품들을 취급한다. 해산물이 살아있으며 현장에서 값을 치르면 즉석에서 조리된 요리를 맛볼 수도 있다.
살아있는 채로 반경 3㎞ 내 어느 곳이든 30분 안에 배달해 주는 서비스까지 있다. 이를 위해 마트 내부의 천장은 수 많은 레일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특수 제작된 가방에 싱싱한 새우, 생선, 랍스터 등을 넣으면 이 레일을 따라 상품 포장 창고로 들어간다.
이후 시간 내 살아있는 상태로 배달이 완료된다. 그야말로 전시, 판매, 체험, 창고이면서 배달 센터의 기능까지 갖춘 만능 자판기인 셈이다. 게다가 소비자의 소비 패턴과 선호 제품 등의 파악이 알리 페이라는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통해서 빅데이터로 누적되면, 이를 분석하여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마트 곳곳에서는 빅데이터를 얻어내기 위해 허마셴셩에서는 허마의 앱에서만 결제를 할 수 있다고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앱을 깔고 있었다.
마트에 가지 않아도 갖가지 육류, 채소, 과일류를 원하는 곳에서 받아볼 수 있는 주문 배달 서비스도 발달하고 있다. 어쩌면 휴대폰 자체가 작은 자판기의 버튼이 되어버린 세상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상해에서 이전에 본 적 없던 택배 보관함을 봤다. '냉장고 택배 보관함'이다. 주로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는 이 보관함은 한 여름에도 먹을거리를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장 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직장인들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서비스다. 택배 도착 시간에 꼭 집에 있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모바일로 원하는 시간대를 선택해두면 그 시간에 맞춰 배달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택배 보관함과 겉모습은 같으면서도 내부의 냉각 장치와 칸마다 뚫린 통풍 구멍이 내부의 공기를 시원하게 유지해 주기 때문에 소비자가 원하는 시간대에 제품을 찾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할 걱정이 없다. 게다가 이 서비스는 최근 처치 곤란 애물단지가 취급 받는 아이스팩도 필요 없다.
중국에서 만난 냉장고 택배함 서비스는 '집안의 냉장고 속까지'(into your refrigerator) 배달해준다는 미국의 월마트와 아마존이 제공하는 '집안까지'(Amazon Key) 배달 서비스와 비교가 됐다.
월마트와 아마존의 서비스는 편리함은 있지만 사생활 침해, 도난 위험, 모르는 타인에게 집안의 모습과 심지어 냉장고 속까지 공개해야 하는 등의 꺼림직한 느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집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배달이 문제 없이 진행됐는지 확인해야 하거나, 도어록을 스마트 도어록으로 바꾸는 등 추가적 조치를 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아마존과 월마트는 고객과 신뢰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월마트는 2019년 초부터 뉴저지에서 약 5개월 동안 '냉장고 속으로' 서비스를 시범 운영했다. 이들은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자 캔자스시티, 피츠버그, 플로리다 베로비치 등 3개 도시에서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런 새로운 서비스들을 접하면서 마치 도시 전체가 자동판매기로 바뀌어 가는 과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튼은 모바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간편해진 것이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러한 서비스는 확장에 다소 애를 먹고 있지만 자판기가 된 마켓은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과 개인의 공간(집)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있다.
여기에 빅데이터가 연결되어 맞춤형으로 상품이 준비되는 똑똑한 자판기 도시가 되는 것이다.
중국 항저우(杭州)엔 빅데이터를 배경으로, 팔리는 물건만 진열하는 진화된 작은 슈퍼마켓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판매 데이터를 분석, 잘 안 팔리는 상품은 과감히 빼버린다. 데이터에 기반하고 판단 및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판매가 부진한 상품까지 계속 진열하지 않아도 되고 그 만큼 필요한 공간을 줄일 수 있다.
아울러 재고가 되는 비율도 효과적으로 줄이고 자금 회전을 원활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형태로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오프라인 매장은 빠르게 온라인 시장으로 옮겨갔지만, 최근 들어 온라인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오프라인 시장으로 되돌아오는 흐름도 목격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되돌아 온 대표 사례는 뉴욕의 '아마존4스타'(amazone4-star) 매장이다. 아마존은 온라인에서 중고책을 판매하며 등장한 기업인데,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종합 마켓을 가진 회사로 발전했다. 오프라인 매장이 없는 온라인의 강자가 뉴욕 시내에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한 까닭은 무엇일까.
2018년 9월 27일 오픈한 4-star 매장은 이름처럼 온라인에서 4개 이상의 별을 받은 상품들만 골라 판매한다는 의미다. 또한 온라인으로만 주문하다 보니 실제 제품을 확인하거나 체험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에게 기히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전시관을 오픈한 것이라는 뜻도 있다.
매장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엇보다 제품 종류가 다행하다. 책, 의류, 중소가전, 컴퓨터와 모바일 주변기기들, 동물 관련 제품까지 망라한다.
온라인에서 이미 소비자들로부터 높은 별점과 좋은 리뷰를 받았기 때문에 고객들의 선호가 반영되기도 했고, 좋은 평가를 받은 제품이 소개된다는 믿음 때문에 상품을 고르는 문턱도 한 계단 낮춘 효과가 있다.
아울러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매장이 있는 뉴욕 지역 사람들이 선호하는 제품들만 따로 모아놓은 테이블이 있어 뉴요커들의 소비 성향에 맞는 제품들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이제, 시애틀의 '아마존 고'(amazon go)로 가보자. 아마존 본사가 있는 도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아성에 맞서 아마존은 시애틀을 먹여 살리는 회사에서 미국의 소비 시장을 리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마존고는 2019년 6월 기준 미국 전역에 12개의 매장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시험 기간을 거쳐 성공적이라는 판단을 얻었다. 아마존고는 미국 전역에 3,000개의 매장을 오픈할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There is no line'(줄 서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존고의 모토다. 고객은 누구나 들어와서 물건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계산을 위해 계산대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되며, 게이트를 통해 나갈 때 들고 나가는 물건, 주머니에 넣은 물건, 가방 속에 집어넣은 물건들이 빠짐없이 인식되고 자동 결제된다. 이러한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는 매장 내에 수백 대의 센서와 카메라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지한다. 어떤 제품 앞에서 몇 초간 서있는지, 어떤 제품을 들었다 놓는지, 심지어 망설이는 모습까지 모두 데이터로 만들어 진다. 이는 분석돼 매장과 상품의 디자인이나 마케팅에 활용된다.
지금까지 어쩌면 슈퍼마켓의 최전방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의 모습들을 만나봤다.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의 마트들은 일부 셀프 계산대를 두고 고객들이 직접 상품을 찍고 계산을 하도록 안내한다.
그러면서 기존 계산대의 인원은 절반으로 줄였다. 물류와 유통의 끝 지점인 마트는 끊임없는 기계화를 통해 무인화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마트는 진화했고, 더 진화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로봇 또는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부를 쌓기에 더 쉬울 것이다. 마트 운영자라면 이런 선택의 유혹이 매혹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어떤 대처를 해야 할 것인가. 로봇 시스템을 거부하는 법을 만들어야 할까?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계공학자들의 연구를 막아야 할까? 아니면 로봇 세금을 신설해야 할까? 데이터 세 나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5년 뒤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우린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업가들의 도전과, 노동력 제공을 통해 삶을 향유해야 하는 노동자 사이에서 적절한 간격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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