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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와인은 로마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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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책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인은 스스로를 다른 인종이나 민족보다 뒤떨어졌다고 여겼으면서 어떻게 역사상 가장 강대한 로마 제국을 건설했을까. 어쩌면 로마인은 자신의 약점과 이민족의 장점을 알았기 때문에 ‘지피지기’할 수 있었고, ‘타산지석’과 ‘반면교사’의 진리를 깨우쳤기 때문에 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로마는 동맹 형태에 따라 차등을 두긴 했지만, 정복지에 자치권과 시민권을 주어 로마로 동화시켰다. 나아가 정복지의 발전된 기술이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로마인을 두고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로마사를 들여다보던 필자는 로마인에게 부족한 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성, 체력, 기술력, 경제력 모두를 함의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바로 ‘와인’이다.
제국 이전의 로마는 와인에 있어서도 타민족들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나 이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하는 과정에서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익히고는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 제국이 된 후에는 정복지 곳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전파했다. 제국 말기에는 와인이 빵, 올리브유, 소금과 더불어 무상복지 품목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잉글랜드(당시엔 포도농사가 가능했다)에까지 와인을 전파했으니, 오늘날 유명한 와인 생산 지역은 모두 로마 제국 당시에 개척된 셈이다.
와인 문외한이던 로마가 어느 날 역사상 가장 찬란한 와인 제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로마가 건국된 기원전 8세기(753년) 즈음으로 거슬러 가, 로마인이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익히고 발전시킨 과정을 살펴보자.
로마가 건국될 무렵 이탈리아반도에는 사비니족(삼니움족), 라틴족 등 여러 부족이 살았다. 특히 북쪽에는 로마인보다 기술력에서 앞선 에트루리아인이, 남쪽에는 지성에서 뛰어난 그리스인이 식민 도시를 건설해 살며 수준급 와인을 생산했다.
늑대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팔라티누스 언덕에 로마를 건국해 양젖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에트루리아인은 지금의 프랑스 부르고뉴에까지 와인을 수출할 정도로 와인산업이 앞서 있었다.
그리스인도 이탈리아반도 남쪽에 식민 도시들(Magna Graecia)을 세워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수출했다. 지금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와인을 전파한 것도 그리스인으로 추정한다.(어떤 학자는 페니키아인이 전파한 것으로 주장한다.) 시칠리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인이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그곳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품종이 많이 재배된다.
한편 땅이 좁고 인구가 적었던 가난한 도시국가 로마는 라틴 동맹에 참가한다. 차츰 인근 부족들을 통합하더니 이내 이탈리아반도 중남부를 통일한다. 한때 켈트인(갈리아인)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로마는 로마연합을 만들어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인이 정착한 곳까지 완전히 로마에 복속시킨다. 기원전 270년 그 유명한 루비콘강을 경계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한 것이다.
로마의 이탈리아반도 통일은 와인의 역사에서 무척 중요하다.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해 가는 500년 동안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 켈트인, 그리스인에게서 그들이 이루어 놓은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완전히 익혔다. 여기에 더해 국내 유통과 장거리 무역까지 와인 산업 전반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여담을 풀자면, 오늘날 와인 강국은 단연 프랑스다. 프랑스인의 조상은 앞서 로마인보다 체력이 뛰어나다는 켈트인의 일파인 갈리아인이다. 이들에게 와인을 전파한 사람들이 로마인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와인 양조에 사용하는 나무통을 로마인에게 소개한 이들이 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앞선 시기의 와인은 암포라에 담긴 덕분에 유적 등으로 전해져 내려오나, 그때(2~3세기)부터는 나무통에 보관한 탓에 썩어 없어져 지금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발전한 기술 탓에 외려 와인의 역사가 일부 소실된 셈이다.
다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반도 밖으로 눈을 돌린다. 지중해 해상권이 눈에 띈 것이다. 당시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가 경제력에서 로마보다 앞선 이유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러 승리하고야 만다.
그 열매는 달콤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물렸고, 카르타고의 농지에 소금을 뿌려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로마가 그토록 얻고 싶었던 지중해를 장악해 로마의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으로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로마는 이후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라인강 유역까지 정복했고, 터키와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에까지 진출해 마침내 대제국이 되었다.
포에니 전쟁은 와인의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남겼다. 로마가 카르타고에서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전리품을 챙긴 것이다. 카르타고 최고의 농업학자인 마고가 쓴 포도나무 재배법을 포함한 농업 기술 전반을 수록한 28권짜리 농업 교과서였다. 아쉽게도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로마의 농업학자인 콜루멜라가 마고의 책을 바탕으로 ‘농업론(De Re Rustica)’을 집필해 남겼다. 또한 플리니우스, 바로, 베르길리우스, 스트라본 등의 학자들 역시 마고의 책을 참고하여 많은 저작을 남겨 로마 제국의 와인 산업을 발전시켰다. 달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파숨(passum), 오늘날 글뤼바인(뱅쇼)과 비슷한 콘디툼(conditum)은 로마인이 카르타고인에게 배운 와인이었다.
마고의 책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될 즈음, 로마에서는 마침 농지개혁이 추진되었다. 로마는 정복한 지역의 공유지를 퇴역 장교나 원로원 귀족들에게 싼값에 임대했다. 그러자 이들은 포로를 노예로 삼아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에서 생산한 대량의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국의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다 보니 소규모 자영농들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야심찬 토지 개혁을 추진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를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완강한 저항 탓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집정관을 지낸 카토가 기원전 160년에 쓴 ‘농업론(De Agri cultura)’에서 주장한 대로 포도 역시 다른 농산물과 마찬가지로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라티푼디움에서 대규모로 재배되었다. 속주에서 생산된 와인마저 싼값에 대량으로 수입되자 로마에는 와인이 넘쳐났다. 어느새 로마인은 와인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도 와인을 짊어지고 다닐 정도였다. 이들은 정복지 곳곳에 포도나무를 심고는 와인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일부 퇴역 용병들은 주둔지에 정착해 포도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었다. 로마군이 거쳐 갔거나 주둔한 곳들은 곧 ‘와인 로드’였으니, 오늘날 가장 유명한 와인 생산지들이다.
이제 로마인에게 와인과 빵은 주식이었다. 그들에게 와인은 기호품이기도 했지만 물에 희석해 마시는 일상적인 음료였다. 남녀노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모두가 와인을 마셨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의 인구는 이미 100만 명에 이르렀는데, 1인당 1일 평균 0.5리터씩 와인을 소비했다고 한다. 요즘 와인 한 병이 750밀리리터이니 거의 한 병을 매일 마신 셈이다.
와인을 파는 주점도 곳곳에 생겨, 오스티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등지의 도시에는 숙박을 겸하면서 음식과 와인을 파는 타베르나나 로마식 거리주점인 테르모폴리움과 같은 여러 형태의 술집이 즐비했다고 한다. 부유층은 ‘고급 와인’이나 와인에 물과 꿀을 섞어 마시는 ‘물숨(mulsum)’을 마셨고, 서민층은 ‘포스카’나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줄기나 씨, 껍질에 물을 부어 발효시킨 ‘로라’에 물을 타서 마셨다. 노예에게도 와인이 배급되었는데,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군인에게도 하루 1리터의 와인이 배급되었다. 더 마시고 싶은 군인은 개별적으로 사서 마실 수도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도 ‘포스카’를 마셨는데, 이는 식초가 되기 직전의 시큼한 맛의 와인을 일컫는다. 군인들은 포스카를 마시며 원기를 회복했다. 또 오염된 물을 정화할 때나 상처를 소독할 때도 포스카를 활용했다. 전투 전날은 평소보다 많은 포스카를 배급하기도 했지만, 규율을 어기거나 군기가 빠진 군인에게는 벌로 배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로마인의 와인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자연재해가 일어나 와인이 품귀 현상을 빚었기 때문이다. 79년의 어느 날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를 매몰시켰다. 순식간에 와인 수출입항과 포도 재배지가 화산재에 덮였다. 자그마치 2년 치의 와인이 화산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물량이 달리자 곧 와인값이 폭등했다.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너도나도 포도 재배에 나섰다. 과연 몇 년이 지나자 와인 물량이 넘쳐났고 당연히 와인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곡물 재배지가 죄다 포도밭으로 바뀌면서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결국 국가가 개입했다. 9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본국에는 더 이상 포도나무를 심지 말고, 속주의 포도나무도 절반을 뽑아 없애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로마인의 생활 속에 와인문화가 굳건히 자리 잡았고, 와인의 경제성에 눈뜬 이들이 칙령을 곧이곧대로 따를 리 없었다. 결국 280년 프로부스 황제는 이 칙령을 폐지했다.
상전벽해, 벽해상전. 흥망과 성쇄를 아울러 실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로마 제국은 둘로 갈라졌다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오랜 세월 역사를 장식했으니 말이다.
로마의 와인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제국은 사라졌을지언정 로마인이 이룩한 와인은 유구히 남았다. 역사에 새겨진 와인 로드를 놓고 보자면, 가히 모든 와인은 로마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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