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피해 구례 주민들 "곧 한파 닥치는데 아직도 조사 중"

입력
2020.11.28 13:00
수정
2020.11.28 13:23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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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냐 재해냐, 아직도 원인규명 중
"대통령 정치인 왔어도 대책 없어"
생계? 막막한데 추위까지 '이중고'
내년 1월부터 수해피해 조사 착수

전남 구례군에서 100일 전 수해를 입은 백모씨가 17일 집마당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전남 구례군에서 100일 전 수해를 입은 백모씨가 17일 집마당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송두리째 수장된 삶 책임져라!"

18일 낮 12시 30분. 화개장터와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시골장인 전남 구례5일장에서 분노에 찬 외침과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섬진강 수해극복 구례군민 대책본부'는 섬진강 수해참사 100일을 맞은 이날 정부의 피해 배상과 수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만장을 들었다. 이재민들은 "마을을 덮친 물난리가 인재(人災)임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대통령과 여야 대표는 수해현장만 다녀가고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다가올 한파를 견뎌낼 생각에 앞이 막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례읍은 지난 8월 8일 사상 최악의 침수 피해를 겪었다. 이틀간 내린 폭우와 섬진강댐의 급격한 방류로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 둑이 끊어졌고 읍내는 절반 가까이 물에 잠겼다. 홍수로 인한 이재민은 1,150여명에 달했고 1,800억원 상당의 재산 피해까지 입었다. 농업과 축산업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지역에선 가축 1만5,846마리가 폐사하거나 물에 떠내려갔고 농경지 502㏊와 비닐하우스 546동이 침수됐다. 현재는 대부분 대피소 생활을 마치고 수리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판넬로 만든 임시조립주택에 거주하는 이재민이 50여가구에 달한다.

18일 구례 5일장 장터에선 섬진강 수해 참사 100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구례=홍인기 기자

18일 구례 5일장 장터에선 섬진강 수해 참사 100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구례=홍인기 기자


18일 구례 5일장 장터에서 열린 섬진강 수해 참사 100일 궐기대회에서 수해 피해를 입었던 할머니가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18일 구례 5일장 장터에서 열린 섬진강 수해 참사 100일 궐기대회에서 수해 피해를 입었던 할머니가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정부와 지방자지단체는 정부재난지원금과 주민들에게 복구비를 지급했지만 물에 잠긴 주택과 상가를 복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재난지원금은 주택의 침수 정도에 따라 일부 침수 200만원, 반파(半破) 800만원, 전파(全破) 1,600만원이 가구당 지급됐다. 여기에 구례군이 긴급복구비로 100만원을, 한국수자원공사가 위로금으로 100만원을 지급했으며, 상가 침수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에게는 200만원이 추가됐다. 그러나 기둥과 벽체, 지붕 등이 완전히 파손된 경우에만 전파로 인정되는 등 지급기준이 까다롭고 주택 복구비용 외에 못 쓰게 된 세간을 새로 장만하느라 적지 않은 주민들은 은행에서 빚을 내 생활하고 있다.

구례 주민들은 침수 피해의 직접 원인으로 '섬진강댐 불시 방류'를 지목하고 있다. 한국수자원공사 섬진강지사는 수해가 난 8월 8일 오전 6시 30분부터 초당 1,000톤을 방류했고, 오전 8시부터는 1,870톤을 방류했다. 수자원공사는 전날대비 무려 5~10배 늘어난 물을 불과 1시간 30분 간격으로 두 차례나 방류하면서도, 방류 7~8분 전에야 방류 결정사실을 구례군에 알렸다.

정영이 구례군 여성농민회장은 이에 대해 "섬진강 하류에 사는 주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이는 섬진강 수해가 명백한 인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성토했다. 구례군은 부랴부랴 주민들에게 대피 문자를 발송하고 읍내에 방송을 했지만, 문자를 읽거나 방송을 듣지 못한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민 최아리씨는 "미처 피하지 못한 93세 할머니는 물이 턱 끝까지 차도 거동이 불편해 둥둥 떠있다가 옆집 이웃에게 가까스로 구조됐다"고 말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섬진강댐을 지키려다 구례가 쑥대밭이 됐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100일 전 수해를 입은 전남 구례군 백모씨씨 주택(사진 아랫부분 가운데) 너머로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100일 전 수해를 입은 전남 구례군 백모씨씨 주택(사진 아랫부분 가운데) 너머로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구례=홍인기 기자

정부는 그러나 구례지역의 침수 피해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에 따른 것이고 댐 관리에는 잘못이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섬진강댐은 100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 하는 큰비를 견딜 수준으로 설계됐는데, 이번 폭우는 5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규모로 쏟아져 예측이나 대처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해가 난 지 석달이 지났지만 원인규명과 책임소재 파악은 요원한 실정이다.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첫 회의를 연 댐하류 수해원인 조사협의회는 내년 1월부터 수해 피해 조사에 착수해 6월께 완료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구례 주민들은 "지금까지 피해 복구에 들어간 비용은 어마어마한데 조사와 배상은 너무 더디다"며 "섬진강 댐 방류로 수해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항구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영이 회장은 "수해가 8월에 났고 피해가 심각한데 제대로 된 조사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구례 주민들의 가슴은 더욱 타들어간다"고 토로했다.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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