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투우는 황소의 정수리를 향해 투우사가 창을 내리꽂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을 자비의 일격(coup de grace)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설이자 진실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빨리 숨통을 끊어 주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사양 산업에는 코로나19 위기가 자비의 일격이다. 126년 전통의 미국 시어스백화점이 오랜 영업난 끝에 2018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는데, 코로나19 위기가 터졌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다른 백화점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가장 오래된 로드앤테일러가 파산절차에 돌입했고, 니먼마커스, JC패니 등도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합병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누마백화점이 코로나19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
한때 백화점은 대중 소비시대를 알리는 희망의 전령이었다. 일본 개화기의 옷가게들이 그런 변화를 간파하고 영업 방식을 서양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이름을 오복점에서 백화점으로 바꿨다. 이제는 전통 의상(기모노)을 넘어 모든 것을 다 판다는 뜻이었다.
1904년 서울의 남촌, 즉 지금의 충무로에 일본계 히라다(平田) 백화점이 진출했다(이 백화점의 자리는 큰 불과 관련이 많다. 백화점에 이어 카바레, 호텔 등 사람들이 몰리는 시설이 들어섰는데, 그때마다 대형 화재를 겪었다. 지금의 대연각빌딩 자리다). 이에 맞서 북촌, 즉 종로의 조선 상인들은 ‘만물상(萬物商)’이라는 연합 상점을 세웠다. 이름으로라도 일본을 100배 정도 앞서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조지야(丁字屋), 미나카이(三中井), 미쓰코시(三越) 등 일본계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섰다. 조선인 가게들은 그 방식을 모방하면서도 ‘백화점’이라는 말은 피했다. 일본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대신 ‘부인상회’라고 불렀다. 종업원들이 전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1년 종로에도 마침내 백화점 간판이 걸렸다. 화신백화점이었다. 이름도 기분 나쁘고 총독부의 비호까지 받아서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원래 귀금속 전문점(화신상회)이었던데다가 식산은행 대출금으로 지어진 6층짜리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그래서 사치와 허영의 상징이었다. 한껏 치장한 여자가 외출하면 “저기, 화신백화점 지나간다”고 놀렸다.
화신백화점은 서민들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훗날 미쓰코시백화점 자리에 생긴 신세계백화점은 서민과 거리를 좁혔다. 신용카드를 통해서였다.
신용카드는 1914년 미국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매출과 대금회수 간격이 길고 부도율도 높았다. 그래서 신용카드 거래는 외상거래라고 간주되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이 이를 외면했다. 그런데 뱅크오브아메리카가 1959년 컴퓨터를 통해 고객 정보를 전산화하고 판매-대금 납입-결제 청구일 간격을 바짝 붙였다. 그러자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이런 사정을 국내에서 제일 먼저 안 것은 신세계백화점이었다. 1963년 백화점 업계에 뛰어든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신용카드가 매출 확장에 아주 유용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1969년 백화점 고객과 그룹 임직원들에게 신용카드를 뿌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몰렸다.
그때 은행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1978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비자카드사의 제휴 제안을 듣고 외환은행이 신용카드를 발급했고, 1982년 다른 은행들이 그것을 좇아 BC카드사를 설립했다. 결국 신용카드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데 신세계백화점이 은행들보다 10년 이상 앞섰다.
신용카드는 사용기록을 남긴다. 오늘날에는 정치후원금이나 공직자의 업무추진비 등이 제대로 쓰였는지 감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나눠 줄 때도 쓰인다. 이병철 회장도 미처 몰랐던 쓰임새의 진화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백화점이나 신용카드가 앞으로 또 어떻게 진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럴 때 변화에 둔감하면, 투우사에게 자비의 일격이나 기다리는 황소 신세가 된다.
올해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지 110주년 되는 해다. 며칠 뒤는 그의 기일이다. 은행보다 앞서서 신용카드 발행을 홀로 시도했던 그의 프런티어 정신과 반도체의 무궁한 가능성을 내다본 그의 사업적 후각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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