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입기에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태도다

입력
2020.11.18 04:30
24면

<16>네 나이에 맞게 입어라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에 맞게 입는 것이 이상적인 패션의 해석이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순간부터 나이에 맞게 입는 것이 이상적인 패션의 해석이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1. 나는 모직 더플 코트를 좋아한다. 가마니처럼 두꺼운 모직 더플 코트를 입고 찬 바람 속에 서 있으면 철인 28호만큼 힘이 세지는 것 같다. 그러나 관점이 다른 누군가는 핀잔했다. “왜, 고등학생 되고 싶어??”

2. 지난달, 역삼동 구제 옷 가게에서 친구가 스웨터를 사주었다. 하늘색과 연두색 스트라이프가 차분하게 배열된 8,000원짜리 스웨터는 로로피아나보다 포근해서 참기름처럼 아껴 입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복식을 연구했다는 이가 달달하게 참견하자 역류성 식도염에 걸리는 줄 알았다. “동심으로 돌아가시고 싶으신가 봐요.”

3. 잡지 일을 한참 할 때도 보름만 빼고 연중 컨버스화를 신었다. 비 오는 날 산중에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신발은 늘 간지나게 지저분했다. 그때 어느 어른이 말했다. “회사에서는 좀 점잖게 구두를 신어라.”

4. 나는 아톰이며 스누피 (특히 우드스톡의 캐릭터를 좋아한다. 철새지만 철 따라 이동하지도 않고 잘 날지도 못해서) 프린트 티셔츠를 자주 입는데 이런 소리를 안 들으면 섭섭할 정도가 되었다. “언제까지 만화 속에서 살래?”

5. 빨강 티셔츠를 입은 날에는 할로윈에 사탕 얻으러 다니는 애 같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그런 말 하려면 자기부터 잘 입어야 한다고 속으로 말했다. 황신혜더러 못 생겼다고 흉보려면 황신혜보다 예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정반대. 분간없이 먹어서 복수 찬 듯 배가 부푼 남자가 여자 몸매 따지고, 나무 늘보보다 게으른 여자애가 부자 남자를 찾듯이.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1. “더플 코트는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는 거친 사나이들이 입는 옷입니다.” 2. “스웨터는 스웨터. 파리에서 무슨 공부를 했든 우리 말 공부 좀 하세요.” 3. “아무리 그래도 앞코가 거위 주둥이를 닮은 그 구두보단 멋진 걸요.” 4. “그 이전에 브랜드 로고 덮인 그 넥타이는 저보다 훨씬 미성숙해 보이는데요?” 5. 너의 그 애매한 보라색 코트는 동짓날 팥죽 끓이다 솥에 빠진 것 같아.”

내가 열세 살 아이처럼 헐렁한 진에 오버사이즈 후디, 킹콩 어그 부츠만큼 큰 트레이닝 신발을 신고 일년 내내 달리기라도 한 걸까? 한국인들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개인성은 왜 유독 더플 코트에 두드러질까? 나는 혹시 기를 쓰고 어려 보이려는 도시 근교의 중년 남자애로 비쳤을까? 낡은 헌팅 재킷과 브이 넥 카디건, 고동색 코듀로이 바지와 무적의 장화 차림으로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면 동네 큰 어른처럼 보였을까? 아님 밀렵꾼?

나는 늘 내 나이에 맞지 않게 입었다. 열세 살 때는 열일곱 살로 보이고 싶었다. 스무 살 가을엔 린드버그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넜을 때 지녔을 법한 크림 색 옥스포드 가방과, 못생긴 나비 칼라가 달린 체크 무늬 셔츠, 존 웨인이 전성기 시절에도 신지 않았을 초대형 부츠를 신고 모두의 약속 장소, 종로 서적에 갔다. 그런 차림으로도 나는 성숙해보이지 않았다. 성인기에 진입했다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몇 년 뒤, 이를 쑤셔도 될 만큼 반짝거리는 애나멜 구두를 신고 의례적인 자리에 간 날도 내 나이보다 들어 보이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옷 입기의 논쟁과 도발은 나이에 집중되었다. 신기한 건, 사람들은 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면서 누가 어리게 입으면 기를 쓰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가치가 갈등을 만들고 믿음이 혼란을 주는 때에는 어려 보이려는 것만큼 한심하고 애처로운 일도 없겠지. 그림이든 정치든 운동이든 다들 극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말도 안 되게 어리고 싶은, 절망적으로 슬픈 사람을 이해하려 들진 않는다. 영원히. 곧 백정 같은 충고가 단칼에 날라온다. 하지 마. 당장 벗어. 물론 전통적인 젠더 드레스코드를 엄격히 따르는 사회라면 옷이 공개된 정체성을 드러내고 도덕적 가치와 관련돼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둘 것이다.

이때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려는 시도는 용서받을 만하고 심지어 낭만적 관심을 받는다는 역설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이 이 방식에 성공했다. 파랗게 질린 스무 살 청년이 출근 첫날, 싼 티 작렬하는 양복을 입었다는 것은 적어도 어른들의 세계와 통하려고 용썼다는 증빙일 테니까. 개업 두 달 째인 의사가 관록 들어 보이려고 고안한 8대 2 가르마며, 위가 플라스틱테, 아래가 금테인 무도수 안경은 단박에 신뢰감을 줄 것이다. 실력이 아니라 나이가 믿음을 주는 희비극. 그런데 세상에 정말로 나이만 한 절대가 없을까?


최근 tvN의 예능프로그램 '온앤오프'에 출연한 가수 구준엽씨가 체크무늬 셔츠와 야상 점퍼, 털모자, 멜빵 등 자신과 어울리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tvN 제공

최근 tvN의 예능프로그램 '온앤오프'에 출연한 가수 구준엽씨가 체크무늬 셔츠와 야상 점퍼, 털모자, 멜빵 등 자신과 어울리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tvN 제공


어느 시기를 거치면서 복식은 의식적으로 떠들어대는 강박으로 변했다. 결국 나이에 맞게 입는 것이 이상적인 패션의 해석이 되었다. (만약 올리버 트위스트를 만나 말을 걸 수 있다면 염소 수염과 야구 모자는 안 챙겨도 새 상자에서 꺼낸 신발을 생략할 순 없다.)

그러나 누가 나이에 맞는 옷 입기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것을 재검토하는 기준일까? 이십 대라면 컨버스 올스타랑 인터넷 쇼핑몰에서 찾은 스키니 진, 캐릭터 정신 없는 구제 가게 용 셔츠를 입어야 하나? 삼십 대라면 꼭 진한 감색 수트와 화이트 셔츠, 범절 있는 첼시 부츠를 신어야 하나? 사십 대라면 반드시 이태원이든 런던 새빌로든 한 벌 값으로 두 벌 맞춘 양복에 블로그에서 본 로퍼를 갖추어야 하나? 오십 대는 필연코 1970년대 부잣집이 나오는 한국 영화 속 가정 교사의 엄격한 유니폼을 따라 해야 하나? 그럼 육십 대엔 중절모를? 그러나 주변 누구도 그렇게 입지 않는다.

모든 이에겐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갖춘 방대한 라이브러리가 있다. 어느 지점이 되면 그 옷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는 때가 온다. 노년의 품위와 청년의 분방함, 두 가치의 결합은 시대 충돌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에. 지금의 사회적 맥락은 예전과 많이 다르지만 젊음이 내포하는 함의성은 기절하도록 강력해졌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세요” 페티시와 “실례지만 몇 년생이세요?“ 포르노는 모두의 노이로제와 계급 의식에 착 달라 붙어 생활 전체를 버무린다. 무시하기로 굳세게 마음 먹지 않은 한 ‘사랑 받고 싶다면 젊고 아름다워라’ 라는 옛 노래 가사를 다른 설명 없이 이해할 것이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이라고 에밀리 디킨슨은 썼다. 번역하면 “어려 보이게 입어라. 사랑 받을 수 있도록” 쯤 될까. 그러나 디자이너들에겐 나이를 보태지 않으면서 라이프 스타일을 표현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 같다. 소년 소녀의 슬림 핏 탱크 탑과 알록달록한 목도리를 첨가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편, 아버지처럼 보이는 걸 교묘하게 피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귀 맞게 입는 법은 나이 먹는 남자들의 숙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 전 아버지의 면 서기 같은 점퍼와 뒤축 나간 구두를 속으로 비웃었다면 이제 후회할 때가 되었다.

갖은 수를 다 써서 한동안 몇 살 어려 보였다고 해도 거기까지인 순간이 온다. 젊음에 위임 받은 세월이 지나면 더 이상 겉모습에 집착할 수 없다. 굴곡 없이 둥근 몸은 노루 같은 이십 대 초반 근육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캣 워크’에 제한이 있다고 선언한다. 꽉 조이는 재질이며 똑바로 서지 않는 칼라 같이 성가신 요소들은 갈수록 번거로워진다. 몰인정한 옷 회사들도 가세해 옷을 해부학적으로 잘라 몸에 딱 붙게 재단하고, 살의 어둠을 추방해 발레리노만 입게 만든다. 결국 어떻게 해도 차이를 극복할 수 없고 진실을 마주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모든 걸 말하고 나니 우리가 잠깐 머무는 우주는 구겨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 끝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구겨지듯이. 역시 가장 큰 두려움은 외향적인 두려움이다. 옷은 영혼을 만들지 않지만 날 선 신경을 어루만져주는 도구였다. 매일 가고 싶었던 휴게소였고, 상처를 숨기는 참호였다. 동시에 굉장한 모험이었지만 우리는 점점 가라앉는다. 지금도 내려가는 중이다. 이윽고 모든 옷을 벗어야 하는 삶의 바닥으로.

가끔 내 자신, 얼마나 변했는지 살펴본다. 노인인지 어린애인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에 대한 감각일까? 나? 과거? 타인? 통념? 시간은 흐른다. 이번엔 좀 더 심각하다. 사람들은 보다 현재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전하고 싶어한다. 젠더 개념이 부식되고, 젊고 늙고에 대한 감각도 희석된 시대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골라야 한다. 과거에 머무를 수 없고, 오늘 발견한 것이 지금과 연관성이 있으려면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의미로는 남성의 해부학을 가진 누군가가 입을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고, 남성성 여성성으로 정의되었던 경계가 흐려지듯이 청년과 노년 사이에도 크로스드레싱의 공식 전통이 시작되었음 좋겠다.

만약 내가 일흔 살에 중절모 말고 스냅 백을 쓴다면 누가 나서서 반체제적인 미학이며 창의적 극단주의의 참 멋진 예라고 옹호해줬으면 좋겠다. 옷 입기에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태도. 그 태도에 올 겨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남은 생이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진실이 하나 더 남았다.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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