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체온을 낮추자

입력
2020.11.12 06:00
27면
무장한 트럼프 지지자. AP 연합뉴스

무장한 트럼프 지지자. AP 연합뉴스


길고 길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제야 끝나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승복하지 않고 소송전을 벌이며 저항하고 있지만 세상은 이미 바이든 당선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번 선거를 보도하는 TV 장면 가운데 머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모습은 소총을 메고 거리를 서성거리는 트럼프 지지자들이었다. 청바지와 야구 모자의 민간인들이 총탄 수십 발의 길다란 탄창까지 끼운 M16을 손에 잡고 서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트럭 위에 장착된 기관총 앞에서 웃고 있는 청년의 미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개표가 진행되고 승자의 윤곽이 드러날 즈음부터 미국 공영라디오(NPR) 뉴스에서는 “온도를 낮추라(lower the temperature)”는 말이 자주 흘러 나왔다. 전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흥분된 감정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이번 선거가 민주적 참여의 열기를 넘어 미국 사회를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선거를 거치며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긴장은 그동안 계속해 축적돼 왔다. 불평등과 인종차별, 이민, 혐오 등 각종 문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회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개별 시민들의 감정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 갔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양분되고 상대를 공존과 협력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못한 채 배척과 섬멸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칸소주의 한 경찰서장이 소셜미디어에 “민주당원들에게 죽음을”이라며 폭력을 선동한 사건은 미국 사회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인지 날 것 그대로 보여 준다.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 경향과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 상태는 트럼프 시대 들어 더욱 심각해지며 이번 선거에서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언쟁을 벌이는 바이든ㆍ트럼프 지지자. AP 연합뉴스

언쟁을 벌이는 바이든ㆍ트럼프 지지자. AP 연합뉴스


내전 직전을 방불케 하는 미국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어 많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민주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동체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상대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는 현상이 점차 잦아지고 있다. 경제성장 둔화와 청년실업, 노령화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해결책은 잘 보이지 않아 일반 시민들은 하루하루 피곤하고 불안한 상태다. 여기에 편승한 일부 세력은 자극적이고 과격한 언사를 내뱉으며 편을 가르고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 이들은 유튜브와 기성 언론을 오가며 막말 뿐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 선동도 서슴지 않고, 철저히 사익을 추구하며 공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상대에 대한 적대감만 들끓어 오르는 상태로 몰아간다.

정치적 감정이 심장에 머무르지 않고 머리끝까지 달아오를 때 민주적 공동체는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디서 시작된 건지 짐작조차 못하는 사이 스며드는 정치 선전과 폭력 선동은 시뻘건 감정에 불을 붙이며 의견이 다른 상대를 같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파괴해야 할 적으로 보이게 한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내부에서 붕괴되는 길을 가게 된다. 어렵게 자리 잡은 우리 사회의 민주 체제가 실패의 경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적 감정의 온도를 낮춰야 한다. 내 귀에 쏙 들어오는 자극적인 선동과 재미없지만 올바른 정보를 구분할 수 있도록 머리는 차갑게 식혀 두자. 그리고 극단을 말하는 자들은 공동체의 적임을 잊지 말자.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