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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꽃 새긴 푸른 옥 술잔이 꽃피운 ‘효’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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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처럼 조선의 왕이나 왕비도 각자 취향이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 에 격주로 토요일에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조선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 대왕대비(선선대의 왕비)나 왕대비(선대의 왕비) 등 왕실 어른들이 생신을 맞이하거나 존호를 받을 때, 즉위한 지 특정한 기념일이 되었을 때 등과 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축하 잔치(연향ㆍ宴享)를 베풀었다. 왕실 잔치는 유교적인 ‘효(孝)’ 사상을 진작시키고 장엄한 의식을 통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냈다.
아울러 문무백관 등을 한자리에 모아 왕실의 건재와 번영을 널리 알리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거행된 왕실 연향의 대부분은 왕실 가족과 친인척, 신하들이 친애의 정을 표현하는 진연(進宴) 계통으로, 그 규모와 의식 절차에 따라 진풍정(進豊呈), 진연,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으로 구분된다.
연향 의식에는 이에 걸맞은 노래, 춤, 연주, 음식 등이 갖춰져야 했고, 각 절차에 필요한 다종다양한 공예품이 종류별로 배치되었다. 잔치용 상차림에 놓이는 그릇은 사용자의 계층에 따라 그릇의 종류와 개수, 재질과 문양 등이 달라졌다. 왕실 잔치의 주인공(주빈ㆍ主賓)에게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술을 올리는 의식인 ‘진작(進爵)’을 위한 기물(器物)은 사용자의 위계에 따라 철저하게 서열화되었다.
‘진작’은 해당 연향의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의례 행위로서 진작에 사용된 기물은 연향을 주도한 주관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된다. 술상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수주정(壽酒亭), 주정(酒亭), 주탁(酒卓)으로 나뉘었고, 술병과 술잔, 술을 뜨는 국자(작ㆍ勺) 등은 옥, 금, 은, 놋쇠, 도자 등의 재질로 구별되었다. 그 중에서도 술잔은 재질과 장식, 수량에 차등을 두어 신분별 위상 차이를 가장 크게 보인다.
술잔의 변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왕과 왕비, 혹은 대왕대비 등에 한해 수주정에 배설되는 옥잔(또는 옥배)이다. 현존하는 궁중 연향 의궤에서 옥잔을 도식(圖式)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09년(순조 9) 순조(재위 1800~1834)가 그의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1815)의 관례(冠禮ㆍ성인 의식)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기록한 ‘기사진표리진작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부터이다.
이 의궤는 손으로 그린 정밀한 채색 도식이 실려 있는 어람용 의궤로서 그림의 수준이 굉장히 뛰어나다. 혜경궁에게 올리는 술잔은 동쪽 수주정에 ‘옥작(玉爵)’이, 서쪽 수주정에 ‘금작(金爵)’이 배치되었는데, 가장 높은 격식을 갖추기 위해 가장 귀한 재료인 옥으로 만든 술잔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향 의궤에서 ‘작’이란 명칭의 술잔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기사진표리진작의궤’가 유일하다.
그 이후 1827년(순조 27) 왕세자 효명세자(1809~1830)가 순조와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1789~1857)에게 존호를 올린 일을 기념하기 위한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 1828년(순조 28) 효명세자가 그의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를 축하하기 위한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 1829년(순조 29) 효명세자가 순조의 40세와 즉위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순조기축진작의궤(純祖己丑進爵儀軌)’, 그리고 1848년(헌종 14) 헌종이 그의 할머니이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60세를 축하하기 위한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에서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 등에 이르기까지 ‘옥배’ 와 ‘옥도화배(玉桃花杯)’ 도설이 등장한다.
이 옥배들 대부분은 ‘기사진표리진작의궤’에 묘사된 옥작과 마찬가지로 꽃 모양 잔의 겉면을 국화ㆍ연화ㆍ매화ㆍ모란 등 다채로운 꽃과 꽃잎이 달린 가지 장식이 감싸고 있다. 이렇게 정교한 투각(透刻) 기법으로 꽃 형태를 조각한 옥잔은 ‘기사진표리진작의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물이다. ‘세종실록’의 ‘오례의’와 ‘국조오례의’의 가례(嘉禮) ‘준작(尊爵)’ 도설에 실린 쌍이청옥잔(雙耳靑玉盞)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옥잔이 왕실 가례에서 술잔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높은 수준의 조각 솜씨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꽃가지를 장식한 옥잔은 조선 후기 연향 의궤부터 나타난다. 다만 아쉽게도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실물 옥잔으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옥배 도설은 중국 명대(1368~1644)와 청대(1644~1911)에 유행한 꽃 모양 옥잔(화형옥잔ㆍ花形玉盞)과 그 형태 및 장식 기법과 문양 등이 매우 유사하다. 투각 기법으로 장식한 꽃 모양 옥잔은 대개 청옥(靑玉)ㆍ백옥(白玉)ㆍ벽옥(碧玉) 등의 푸른빛을 띠는 맑은 옥으로 제작되었다.
명ㆍ청대에 옥의 생산량과 품질이 대단히 발전하면서 궁중 안에 옥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청을 두었고, 조각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난도의 다양한 옥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꽃 모양 옥잔은 중국에서도 특수한 기형으로써 명ㆍ청대 황실의 진설품(陳設品)으로 애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이와 비슷한 옥잔이 조선 왕실 잔치에서뿐만 아니라 선왕(先王)들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진전(眞殿) 의례에서도 사용되었다. 경운궁 선원전(慶運宮 璿源殿)에 모실 선왕(태조ㆍ숙종ㆍ영조ㆍ정조ㆍ순조ㆍ문조ㆍ헌종) 일곱 명의 어진을 모사한 행사에 관한 기록인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摹寫都監儀軌)’(1901)에는 작헌례(酌獻禮) 때 올리는 옥잔과 옥잔 받침이 채색 도설로 그려져 있다.
작헌례용 옥잔은 전부 규화형(葵花形)과 도화형(桃花形) 등으로 이루어진 화형 몸체에 표면을 세밀하게 투각한 여러 꽃가지가 에워싸고 있다. 선원전의 제2실에서 제7실까지 봉안되는 6종의 화형 옥잔은 각기 다른 형태의 옥잔이 사용되었다. 이 옥잔들에는 ‘진옥잔(眞玉盞)’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대 문헌기록을 통해 ‘진옥’이 옥 중에서도 품질이 매우 뛰어나고 귀한 옥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궁중 연향에서 주빈(主賓)의 지위와 위상을 표출하기 위해 최고급 기물로 사용된 옥잔이 어떻게 길례(吉禮)에 속하는 진전 제향에도 비치될 수 있었을까? 진전 제향은 당대(當代) 세속의 관습이나 시대의 필요 등에 따라 거행하던 ‘속제(俗祭)’에 포함되는 의례로, 진전은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듯이 모신다는 원칙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돌아가신 선왕을 살아 계시듯 정성을 다해 봉양한다는 의미에서, 일상 잔치에 쓰였던 옥기나 금은기를 제상에 올릴 수 있었다고 파악된다. 즉 연향에서의 진작 기물인 옥잔이 ‘효’라는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는 점에서 진전 제기로서의 옥잔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작헌례용 옥잔 도설 또한 명ㆍ청대 황실에서 사용된 화형 옥잔과 깊은 연관성을 보이는데,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옥잔과 비교해보면 도설에 묘사된 안바닥의 꽃술 부분까지 그대로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수록된 다례(茶禮) 때 봉안되는 여러 유형의 옥잔 중에는 양 손잡이에 이룡(?龍ㆍ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뿔이 없는 용의 한 종류) 장식이 달려 있는 옥잔도 있다.
이는 왕실 잔치에서도 사용된 옥잔 유형으로, 이룡이 장식된 옥잔이 15세기 전반에 명나라 황실에서 조선 왕실로 하사되었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화형 옥잔의 하사 또는 수입에 관한 문헌 기록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룡 장식 옥잔과 비슷한 방식으로 조선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꽃 모양 옥잔’은 조선 왕실 잔치와 진전 제사에서 왕의 권위를 시각화하기 위한 최고의 격식을 갖춘 예기(禮器)로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의궤 도설로만 남아있으나 명ㆍ청대 황실의 고급 진설품으로 사용되었던 옥잔들을 통해, 당시 조선 궁궐에 놓였던 화려한 푸른빛의 옥잔을 짐작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30회로 ‘조선왕실의 취향’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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