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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에 구멍 만들면? 노동환경연구소 "드는 무게 10% 줄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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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포장대에서 손잡이 구멍이 뚫린 상자는 잽싸게 사라집니다. 무겁고 큰 상자를 손잡이 없이 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포장대에서 테이프와 비닐 끈이 사라지면서 간이 손잡이를 만들 수도 없게 됐으니, 미끄러운 상자를 품에 끌어안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온라인 주문이 밀려들면서 도처에 상자가 가득한데요. 상자를 운반하는 택배 노동자와 마트 노동자는 오늘도 무거운 상자와 씨름 중입니다.
"박스를 들 때마다 장갑을 끼고 해도 매번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스에 손잡이 꼭 뚫어주세요". "통조림, 설탕 등 최하 15~20kg인 제품들이 많습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수량을 적게 포장했으면 합니다"
마트 노동자들은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만들 것을 요구하며 지난달 전국 6개 지역(경기, 인천, 경남, 울산, 부산, 충청)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습니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만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작년 6월 노동환경연구소에서 발표한 '마트 노동자 근골격계 질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자에 손잡이를 만들 경우 중량물 하중의 10% 정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은 40~50대 여성입니다. 위 실태조사에 참여한 5,177명 중 4,999명(97%)이 여성이었고, 평균 연령은 50.4세였어요.
대다수의 마트 노동자가 중년 여성인 것에 비해 노동강도는 매우 센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태조사 결과 음료·주류를 관리하는 작업자는 평균 10.8kg의 제품 상자를 하루 평균 403회, 세제 관리 작업자는 평균 10.6kg의 제품 상자를 하루 평균 149회 들고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다수의 마트 노동자가 손목, 어깨, 허리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위 실태조사 참여자 중 85.3%가 어깨, 허리, 무릎 등에서 통증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거나 한 달에 한 번 이상 반복된다고 대답했어요. 근골격계 질환 때문에 지난 1년간 병원 치료를 받은 사람도 69.3%에 달했고요.
노동환경연구소 실험 결과, 상자 손잡이가 있는 경우 들기지수('고용노동부 고시 근골격계 부담 작업의 중량물 기준' 대비 현재 취급하는 물건의 무게 비율)가 1.24에서 1.12로 9.7% 감소했습니다. 손잡이와 작업 자세를 동시에 바꾸면 들기지수가 최대 38.7%까지 감소, 그만큼 신체 부담을 줄일 수 있고요. 이렇게 중요한 상자 손잡이, 왜 지금껏 만들지 않고 있는 걸까요?
지금껏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지 못하는 이유가 비용 문제 때문일까요? 상자 제조업계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손잡이 구멍을 뚫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국박스산업협동조합 관계자는 지난달 28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구멍을 뚫을 때 따로 엄청난 설비가 필요하진 않다"고 답했습니다. 조합 관계자는 "표준규격 상자와 크기·모양이 다른 상자를 만들려면 목형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며 "목형은 장난감 만들 때처럼 녹인 플라스틱 물을 프레스로 찍어 만드는데, 목형 제작비용은 대개 10~15만 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구멍을 안 뚫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구멍을 뚫기 위해서 추가되는 비용은 미미하다"고 말했습니다.
소규모 물량을 취급하는 상자 제조업체 A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기존 박스 제작라인에 볼트를 끼워 구멍을 낸다"며 "추가 비용은 거의 없고 시간이 10~15분 추가로 소요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용 문제가 아니라면 업계·관련 부처의 무관심 때문 아닐까요? 대형마트 측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는 입장인데요. 홈플러스 홍보팀 관계자는 지난달 28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체브랜드(PB) 상품 중 5kg 이상인 상자를 중심으로 손잡이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면서도 "외부 제조업체에게 박스를 바꾸라고 하는 건 유통업체의 갑질"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스 상자는 납품업체가 제작하니 유통업체인 대형마트는 아무 책임이 없는 걸까요? 아니요. 대형마트 사업주는 마트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작업 환경을 개선할 법적 의무가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39조에 의하면 사업주는 '단순 반복작업 또는 인체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작업에 의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다. 만약 사업주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동법 제168조에 따라 벌칙이 부과됩니다.
덧붙여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663조에 따라 중량물 작업 시 과도한 무게 때문에 근골격계에 무리한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제665조에 의거해 5kg 이상의 중량물을 취급할 땐, 취급하기 곤란한 물품에 손잡이 등 보조도구를 활용해야 하고요.
게다가 상자에 손잡이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작년 10월 21일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국정감사장, 손잡이 없는 상자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마트 노동자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어요. 당시 환노위 소속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따져 물었고, 이 장관은 빠른 시간 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손잡이가 없는 물건을 소비자가 개선해달라고 하면 마트에서 개선 안 하겠습니까? 금방 손잡이 만들 거 아니에요? 근데 노동자들이 작업하면서 손잡이가 없어서, 근골격계에 무리가 가서, 골병이 들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마트 외에도 제조업체 공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노동자나 중간 유통과정에서 운반하는 노동자들이 어쩌면 같은 문제를 겪고 있을 겁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2019년 10월 21일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중)
빠른 시간 내 마트산업노조, 대형마트 본사, 납품업체들과 간담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의견 수렴을 한 뒤 무거운 상자에 손잡이를 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2019년 10월 21일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중)
지난해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약속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고용노동부가 주관하고 대형마트, 납품업체, 상자제조사, 마트산업노조가 참여하는 간담회가 몇 차례 진행됐습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4월 시작된 '마트노동자 근골격계질환 예방 가이드 마련에 관한 연구' 용역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요.
하지만 올해 환노위 국정감사에서도 상자 손잡이 설치를 둘러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졌습니다. 지난달 15일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국감 이후 실제 현장에서 개선이 됐냐"고 물었고, 박화진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장은 "근로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아직 없다는 게 평가이고, 그 부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어요.
같은 달 26일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은 "연구 용역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설 명절 전에는 손잡이 도입을 약속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변화도 있습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는 지난달 20일 고용노동부에 자체브랜드(PB) 상품 상자에 단계적으로 손잡이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개선안을 제출했습니다.
이마트는 무게가 5kg이 넘지만 손잡이가 없는 PB 상품 595개 중 35개 상품 상자에 연말 내 손잡이를 설치할 계획입니다. 롯데마트는 올해 내 손잡이 설치가 상품 손상을 일으키지 않는 제품을 대상으로 15%까지, 홈플러스는 전체 PB 상품의 29%에 손잡이를 설치할 예정이에요.
마트산업노조 관계자는 "개선이지만 전체 상품으로 보면 PB 상품의 비중이 크지 않다"며 "당장 적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계적으로 하겠다는 걸 보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답했습니다.
마트 노동자들이 그동안 상자 손잡이 설치만 요구했던 건 아닙니다. 소포장 실시, 중량물을 드는 수직 높이 제한, 높이 조절이 가능한 대차 설치 등 '아프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여러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박스 손잡이 구멍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건 '가장 현실적이고 즉시 적용 가능한' 방안이라고 보기 때문인데요.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외부 제조업체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더딥니다. 대형마트 관계자들은 조심스러운 문제이니만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화와 협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마트산업노조 관계자는 "당사자가 아닌 분들은 다급하게 생각을 안 하시는 것 같다"며 "마트 노동자들은 하루하루가 괴롭다. 비용을 들이더라도 반드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택배연대노조 관계자도 2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하루 평균 300~400개의 상자를 나르는데, 손잡이 구멍이 생기면 (물건을 옮기는데) 한결 도움이 된다"고 답했습니다.
지난달 15일 환노위 국감에 출석한 박화진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장은 "각 업체별로 자체적 (상자 손잡이) 개선책을 받고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실질적인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인데요.
대형마트의 개선책이 계획에만 그치지 않도록, 돌아오는 설에는 마트 노동자와 택배 노동자의 노동 강도가 줄어들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의 발빠른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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