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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 선배 무서워 렌터카 보험사기 '마네킹' 됐다" 10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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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박인주(가명). 그는 동갑내기 '일진(학교폭력 가해자)' 이대인(가명)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삭풍이 불던 지난해 12월 어느 날, 이대인은 예고도 없이 아반떼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번호판에 ‘허’가 새겨진 렌터카였다. 막무가내로 타라고 하기에 박인주는 이대인이 몰고온 차량 뒷자석에 타야만 했다.
이대인은 경기 지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여기가 좋겠다"며 차량을 세웠다. 바닥에 ‘진입금지’ 안내문이 선명하게 쓰여 있는 일방통행 길이었다. 이대인은 그 길에 차를 세우고 창 밖을 주시했다. 10분쯤 흘렀을까. 흰색 스포티지 한 대가 일방통행 길을 역주행해 들어왔다.
“쾅” 소리가 났다. 속도를 높일 수 없는 골목길이라 좀처럼 사고가 크게 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소리는 매우 컸다. 스포티지를 발견한 이대인이 재빠르게 그 차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기 때문이다. 박인주의 머리가 순간 '핑' 돌았다.
‘마네킹’, 그것은 일진 말을 거역할 수 없는 학교폭력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는 고등학생, 박인주의 또 다른 호칭이다.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역할을 한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하지만 그들 세계에서 박인주 같은 ‘마네킹’은 합의금을 빼앗기며 이용만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다음날 고교 졸업생 선배인 김주빈(21·가명)이 박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주빈은 어느 병원이든 빨리 찾아가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박인주는 ○○한방병원을 찾아 침을 맞았고, 열흘치 약도 받았다. 다음 치료 날짜까지 예약했다.
박인주가 한방병원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일반병원과 달리 한약을 처방하기 때문에 손해보험사가 내주는 치료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보험사에서 받게 되는 합의금도 덩달아 많아진다. 때문에 이 한방병원에는 박인주 같은 ‘나이롱 환자’가 많았다.
다음날 박인주 통장엔 140만원이 꽂혔다. 보험사가 입금한 합의금이었다. 박인주는 김주빈에게 전화를 걸어 보험금이 입금된 사실을 알렸다. “야, 너 체크카드를 학교 앞 편의점에 맡겨놔.” 김주빈은 후배인 박인주에게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물어 ATM(현금자동입출금기)으로 90만원을 찾아갔다.
나머지 50만원도 박인주 몫은 아니었다. 김주빈은 나이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르는 황선욱(가명) 계좌로 잔금을 이체하라고 소리쳤고, 겁을 먹은 박인주는 그대로 따라야 했다. 결국 돈은 순식간에 사건의 주범들에게 모두 빠져나갔다.
박인주가 몸도 다치고 돈도 빼앗기는, 이런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놀랍게도 사건을 기획한 총책은 따로 있었다. 박인주는 보험사에 제출한 자필 자술서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으며 “30대 후반의 경기 지역 일진 선배 출신인 '카이저'가 두려워 가담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박인주를 움직인 이대인 역시 모집책일 뿐이며, 김주빈도 카이저의 휘하에 있는 주범 가운데 한 명이었다. 또 박인주와 함께 차량에 동승한 또 다른 ‘마네킹’ 3명도 박인주와 같은 학교의 또래였다.
총책 카이저와 모집책 이대인, 주범인 김주빈 등 같은 고교·지역 출신 일진 선배그룹이 박인주 같은 후배나 또래집단을 ‘마네킹’으로 활용한 게 사건의 실체였다. 보험사는 박인주의 자술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경찰에 수사의뢰 했다.
더 큰 문제는 박인주와 같은 10대 ‘마네킹’을 동원한 렌터카 보험사기 범죄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로 쓰는 사고 수법은 ‘뒤쿵’이다. ‘뒤쿵’이란 주행 중 차선을 변경하거나, 가벼운 법규 위반을 하는 차량을 뒤에서 들이받는 수법으로 고의로 사고를 유발해 보험금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이런 사고를 반복적으로 내기 위해 동창생 전화번호를 알아내 지속적으로 괴롭히거나 협박해 ‘마네킹’으로 활용한다.
‘마네킹’은 일진 그룹의 끈질긴 요청과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범행에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마네킹’이 타낸 보험금은 박인주의 경우처럼 일진에게 다시 갈취 당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더 억울한 일을 당한다. 보험사기 일당이 수사기관에 검거되면, '마네킹' 앞으로 입금된 돈은 보험사에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일진은 '마네킹'에게 갈취한 돈을 이미 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탓에, 결국 계좌 명의자인 ‘마네킹’이 배상책임까지 짊어져야 한다.
'마네킹'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경찰은 단순 가담자인 ‘마네킹’을 ‘일진’과 공범 관계로 보기 때문에, '마네킹'은 사법처리까지 감수해야 한다. 다만 '마네킹'이 수사에 협조할 경우 검찰에서 기소유예 등으로 선처받기도 한다.
이처럼 '마네킹'을 활용한 10대 렌터카 범죄가 전국적으로 활개를 치고 있지만, 경찰의 수사의지는 낮은 편이다. 익명을 요구한 손해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범죄 수사성과는 경찰 승진에 영향을 주는 인사고과에 높은 점수로 반영되지 않아, 조직적인 범죄 단서가 발견돼도 수사 확대에 소극적이다”고 말했다. 경찰의 수사관행이 개선되지 않는 한 날로 지능화하는 '마네킹' 범죄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마네킹' 범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박인주의 소원은 과연 이뤄질까.
※이 기사는 박인주가 보험사에 제출해 수사기관으로 넘긴 자술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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