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노(魯)나라에 미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가 폭우를 만났다. 비 때문에 여인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결국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하여 교각을 끌어안고 죽었다. 허무 개그에 가깝다. 여기서 나온 말이 미생지신(尾生之信)이다.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2,000년 후 미생지신이 미국에서 TV쇼로 환생했다. 1960년대부터 근 30년 간 높은 시청률을 유지했던 '흥정합시다(Let’s Make a Deal)'라는 퀴즈쇼이다.
그 퀴즈쇼의 우승자에게는 최고급 스포츠카를 가져갈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사회자가 그냥 주지 않고 우승자의 운을 시험한다. 세 개의 문 뒤 어느 하나에 스포츠카를 숨겨 놓고, 출연자가 문 하나를 고르도록 한다.
사회자는 결과를 바로 확인하지 않는다. 출연자가 고르지 않은 나머지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먼저 연다. 하필 거기서 선물이 나오면 출연자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선물이 없으면, 크게 안도하는 출연자를 향해 사회자가 다시 묻는다. 처음의 결정을 지킬 것인가, 아직 열리지 않은 다른 문으로 마음을 바꿀 것인가? 어느 쪽이건 확률이 2분의 1이라서 고민이 생긴다.
정말 그럴까?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출연자가 처음 고른 문 뒤에 선물이 있을 확률은 3분의 1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어딘가에 선물이 있을 확률은 3분의 2다. 그 두 개 중 하나를 열어서 선물이 없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하나의 문 뒤에 선물이 있을 확률이 3분의 2다. 출연자가 처음 골랐던 문의 확률 3분의 1보다는 두 배나 높다. 그러므로 출연자는 선택을 바꾸는 게 유리하다. 상황이 바뀌고 새로운 정보가 주어졌는데도 처음의 결정을 고수하는 것은 미생지신이다.
물론 출연자가 처음 골랐던 문에 선물이 있을 확률은 여전히 3분의 1이다. 출연자가 마음을 바꿔 다른 문을 골랐는데, 그 뒤에 아무것도 없을 불운이 3분의 1이나 되는 것이다. 실제 TV쇼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생겨서 출연자가 후회하고, 시청자들은 안타까워했다.
남들이 그런 불운을 겪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면서 핀잔을 준다.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바꿨다가 결과가 나쁘면, 그것을 경거망동의 대가라고 비웃는 것이다. 판단의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다.
좋은 판단이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결과의 확률을 높일 뿐이다. 반대로 판단이 잘못되어도 결과는 좋을 수 있다. 그러므로 결과만 보는 태도는 대단히 원시적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전래 속담도 아니다. “목탁은 소리 때문에 쓰임을 받다가 결국 부서진다(鐸以聲自毁)”는 고사성어가 엉뚱하게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소리 내지 말고 죽은 듯 있으라는, 보신주의적 충고다. 하지만 소리 없는 목탁은 당장에 부서지기 마련이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 쏟아진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오늘 그대로 하고 있다면, 새로운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지 않은, 미련한 고집이기 쉽다. 가만히만 있으면 절대로 중간도 못 간다.
'흥정합시다'라는 TV쇼는 1990년대 초 종영했다. 매릴린 사반트라는 사람이 뉴욕타임스지 칼럼을 통해 처음의 결정을 고집하는 것은 미생지신임을 명쾌하게 입증했기 때문이다. 멘사 클럽 회원이자 IQ 최고 기록 보유자인 그녀가 TV쇼의 신비감을 벗겨 버리자 콘크리트 같던 시청률은 뚝 떨어졌다.
만일 문이 3개가 아니고 100개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사회자가 문을 하나씩 열면서 그때마다 출연자에게 선택 변경의 기회를 준다고 하자. 그때도 매번 선택을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 아무 정보가 없었을 때의 1%였던 확률이 새로운 정보를 갖고 ‘경거망동’할수록 100%를 향해 점점 올라간다. 사반트의 결론이다.
미국 시청자들은 첫 결정을 고집하는 것이 미생지신임을 깨닫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국인들이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는 말이 미생지신임을 깨닫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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