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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ㆍVIP가 애용하는 美 ‘군 병원’, 한국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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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잠시 연재했던 ‘정승임의 궁금하군’을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군 세계에 정통한 고수보다는 ‘군알못’(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글을 씁니다.
이달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린 사실을 스스로 트위터에 알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74세 고령인 그가 ‘위풍당당’ 걸어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군 병원입니다. 백악관과 가까운 세계 최대 명문인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을 놔두고, 워싱턴 D.C. 근교의 월터 리드(Walter Reed) 국군 병원에 몸을 맡긴 겁니다.
군의관이자 세균학자였던 ‘월터 리드’ 소령의 이름을 따 1909년 개원한 이 병원(2011년 해군병원과 통합)은 지난 100년간 1ㆍ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에 참전한 미군의 치료와 재활을 담당해온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시설입니다. 병원 입구에 ‘미군의 전투력은 우리 병원에서 나온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릴 정도입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아 억만장자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을 받은 것이지요.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을 목전에 두고 비교적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곳에서 사흘 간 치료와 집무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욱 국방부 장관도 지난 7일 국정감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군 병원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 질의에 “그만큼 의료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미군 병원은 군인 뿐 아니라 백악관 VIP들이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해군국립병원(NNMC)은 2011년 월터 리드 육군병원과 통합되기 전까지 대통령들의 단골병원이었습니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곳에서 대장암 수술을,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무릎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3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MRI 검사를 받아 화제가 된 월터 리드 육군 병원은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과 2010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밥 돌 전 상원의원이 수술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의료 수준이 높은데다 보안과 경호까지 용이하니 VIP 치료에 제격이지요.
물론 우리에게도 대통령 일가의 치료를 전담하는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당한 직후 옮겨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지구병원장이었던 김병수 공군 준장이 시신을 검안하면서, ‘배에 난 피부병 자국’만으로 실려온 환자가 박 대통령인 것을 알아채 화제가 됐습니다. 2002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위장장애로 입원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우리 군 병원은 상징성과 위상 면에서 미군 병원에 크게 못 미치는 듯 합니다. 대통령의 건강을 책임지는 주치의를 서울대병원이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등 이른바 ‘빅5’ 출신이 꿰차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현역 영관급 군의관이 주로 맡아온 청와대 의무실장도 박근혜 정부 땐, 세브란스병원 교수가 낙점됐으니 말입니다. 미 군의관들이 ‘백악관 닥터’로 불리며 대통령의 주치의를 도맡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최대 수요자’인 장병들부터 군 병원을 외면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씨의 특혜 휴가 논란도, 군 병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군의관은 무릎 통증을 호소하는 서씨에게 ‘의학적으로 군병원에서 충분히 진료 가능한 상황’이라고 진단했지만 군 병원이 못 미더운 서씨가 삼성서울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병가를 내면서 특혜 논란이 시작된 겁니다.
25일 윤주경 의원실이 국방부에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병사들의 군 병원 이용률은 45.2%에 그쳤습니다. 2015년 58.4%에서 △2016년 54.5% △2017년 51.5% △2018년 46.7%로 하락세를 이어온 겁니다. 반대로 지난해 민간병원 이용률(진료비 기준)은 5년 전(29.7%)보다 늘어난 37.2%였습니다.
군에서 치료 받으면 무료인데, 병사들이 어렵게 민간병원을 찾는 이유는 그간 드러난 낙후된 군 의료 실태 때문입니다. 2005년 전역 보름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숨진 노충국씨 사례는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군 복무 중 심한 복통에 시달려 군 병원을 찾았지만 군 의관이 위궤양이라고 판단해 약 처방만 했기 때문입니다.
목 디스크 치료를 위해 군 병원을 찾았던 육군 병장이 소독용 에탄올 주사를 맞아 팔 마비 증상을 보였다거나 경계 근무를 서다 총상을 입은 병사가 군 병원을 찾았지만 수술을 못한다며 되돌려 보낸 사례 등은 군 의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군대가 병을 키운다’거나 ‘돈 있는 집 병사는 민간 병원으로 가고, 가난한 집 병사들만 군 병원을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습니다.
급기야 국방부는 병사들에게 진료선택권을 확대한다며 민간병원 진료를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민간병원에서 치료 받을 시, 자비 부담에 대한 지원 확대 방안을 검토하는가 하면, 올 초에는 현역 병사가 간부 인솔 없이도 외출해 민간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간소화 방침도 발표했습니다. 군 병원이 버젓이 있는데도 민간병원을 권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씁쓸하기도 합니다.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총상을 당한 석해균 선장과, 2017년 판문점 귀순 당시 총상을 입은 인민군 병사의 치료를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이 전담한 것도 군 의료당국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습니다. 국내 최대 ‘총상 환자’ 치료 전문가가 군이 아닌 민간에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군 의료가 낙후된 근본 원인은 전체 군 의관(2,400명) 가운데 94%가 단기 복무자라는 데 있습니다. 군복무를 대체하는 ‘3년짜리 징집 의사’들로 채워지다 보니 숙련도와 전문성이 떨어지는 겁니다. 일각에선 군 병원이 ‘초보의사들의 실습실’이란 비아냥까지 나왔지요.
장기 군의관 양성을 위한 노력이 없던 건 아닙니다. 2008년 박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군 의료 인력을 안정적으로 배출하기 위한 ‘국방의학원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연간 40명의 장기복무 군의관과 60명의 공중보건의 양성을 목표로 한 이 법안에 여야 의원 90명이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리면서 급물살을 탔습니다. 국방의학원이 전시에 특화된 외상과 화생방전, 세균전에 대비한 군의관을 배출할 것이란 장밋빛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 공급 과잉을 우려한 대한의사협회의 반발로 결국 무산됐습니다.
군 의관 양성은 현재까지 큰 진전이 없지만, 대신 군 당국은 500억원을 들여 올해 국군수도병원에 국군외상센터를 개소했습니다. 그 동안 민간에 맡겼던 외상치료를 군에서 도맡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총 60병상 규모로 헬기 이착륙 시설, 응급처치ㆍ검사ㆍ수술 기능이 융합된 전문 수술실 등 국내 최고 시설을 구비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입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군 병원이 월터 리드 병원 수준으로 거듭나 장병들이 안심하고 치료를 받는 날, 대통령이 당당하게 군 병원을 찾고, 실력으로 무장한 군의관들이 대통령 주치의를 꿰차는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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