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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7일 "평창" 발표에 눈물 흘린 이건희... 영광과 시련의 장면들

입력
2020.10.25 16:00
수정
2020.10.2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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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이 2011년7월7일 남아공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평창올림픽 유치가 발표되자 눈물을 흘리며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이 2011년7월7일 남아공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평창올림픽 유치가 발표되자 눈물을 흘리며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파란만장한 삶이 말해주듯,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삶엔 영광의 시간도, 그에 못지 않게 시련의 시간도 많았다. 그의 78년 인생 중 그 개인과 한국 경제에 주요한 변곡점이 됐던 장면들을 살펴봤다.

장면1. "동계올림픽 개최지는... 평창"

지난 2011년7월7일 자정 무렵은 생전 그에겐 가장 뜻 깊었던 순간으로 회자되고 있다.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IOC) 위원장으로부터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대한민국 ‘평창’이라고 발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현장에서 그가 눈물을 보인 모습이 전세계에 생중계로 전해졌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이겨내고 가져온 결과물이었기에 감정이 더 격해졌던 듯했다.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2009년 무렵, 이 회장의 운신폭은 넓지 않았다. 삼성특검 사태 여파로 검찰에 기소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직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2차례(2010년 캐나다 벤쿠버, 2014년 러시아 소치)나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서 이 회장의 역할론이 부각됐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그에게 2009년말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일각에서 특혜 시비가 불거졌고 이 회장의 중압감도 커졌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실패할 경우, 쏟아질 여론의 비난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사면 이후 10여일에 한번 꼴로 해외를 찾아 직접 100여명의 IOC 위원들과 접촉했고, 2년 뒤 그 결실이 이뤄진 것이다. 이 회장은 평창 유치 확정 소감을 묻는 질문에 “모두 저보고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만든 것이다”며 “나는 작은 부분만 담당했을 뿐이다”고 몸을 낮췄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서명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서명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장면2. "내 사재를 털어 인수하겠다"

"요즘 전자 부문이 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투자할 여력도 없고 명분도 없는데 빚만 가득한 회사를 인수한다니요."

이 회장이 서른 두 살이던 1974년. 삼성전자는 당시 동양방송 이사이던 이 회장의 돌발 행동에 발칵 뒤집어졌다.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5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시 경영진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격하게 반대했다. 전 세계가 오일파동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앞서 진출했던 삼성전자 등이 경영난에 허덕이던 때였다. 창업주인 선친 이병철 회장도 한국반도체 인수를 반대했다. 이 회장의 끊임없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굽히지 않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전자 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반도체 자급에 달려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회삿돈이 아닌 사재를 털어 그해 12월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열매는 달콤했다. 1992년 세계 최초의 64메가비트 D램 개발에 힘입어 메모리 반도체 강자로 떠오른 이후, 현재까지 부동의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장면3. 불 태운 애니콜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 운동장 한 가운데 삼성전자 제품이 빼곡이 쌓여있었다. 휴대폰(애니콜)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자 이 회장이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주라고 지시했고, 그렇게 수거된 휴대폰 등 불량품이 무려 15만대에 달했다. 운동장에 모인 임직원은 2,000여명. 그들은 해머를 든 10여명이 전자제품을 내리치는 걸 숨 죽인 채 지켜봐야 했다. 산산조각이 난 휴대폰에 불까지 붙였다. 금액으로 따지면 당시 돈으로 500억원이 넘었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이었다.

물론, 강경책만 고수한 건 아니다. 2007년 애플 ‘아이폰’의 출몰과 함께 불어 닥친 스마트폰 시장의 선제적 대응 미숙으로 휴대폰 사업부가 흔들리자, 이 회장은 직원들을 격려하고 나섰다. 이 회장은 “공포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기죽지 말라”며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오늘날 ‘아이폰’을 누르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평정한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의 탄생 배경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2008년 3월 12일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석,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용철 변호사가 2008년 3월 12일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석,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면4. 김용철, "이건희 지시로 비자금 관리했다"

시련 또한 적지 않았다. 지난 2000년 전국 법학교수 43명은 그룹 경영권 상속을 위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하게 했다며 이 회장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이어 2005년 삼성에서 ‘떡값’을 받았다는 검사들의 실명이 공개된 이른바 ‘안부 X파일’ 사건까지 불거지면서 이 회장 등은 궁지에 몰렸다.

최대 위기는 2007년10월에 찾아왔다. 당시 삼성그룹 옛 구조조정본부(옛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이 회장 지시로 금품 로비는 물론 자신 명의의 비밀 계좌로 50억원대 비자금 관리를 했다고 폭로했다. 이는 앞선 사건과 함께 연쇄 반응을 일으키면서 사회적인 비난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결국 이 회장은 2008년4월 조준웅 특별검사팀에 의해 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 법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 일부 유죄가 인정됐고 이 회장은 2009년8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확정됐다.

김기중 기자
안하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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