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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라는 말의 근원 알았다...연극으로 치유한 중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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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 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30세에 독립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인생 2막의 출발점이었어요.”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서울시 50플러스재단’ 중부캠퍼스에서 만난 안은영(53) '표현하는 인생연구소 협동조합' 대표는 인생 2막을 열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이름부터 낯선 안 대표의 협동조합은 아마추어 연극인들의 공연을 비롯해 치유적 글쓰기 강의 등을 하는 곳이다. 출산ㆍ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과 50대 이상의 은퇴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인생 2막을 '코치'해 주는 역할이다. 안 대표는 조합에서 연극 연출과 글쓰기 강의 등을 직접 한다. 최근에는 동영상 제작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안 대표의 하루하루는 불과 10년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50대 중반을 향하는 안 대표는 비교적 일찍 인생 2막을 시작한 편에 속한다. 출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안 대표는 남편과 함께 미국과 멕시코 등에서 14년간 선교활동을 하다 2010년에 귀국했다. 안 대표는 “당시 40대 초반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에서 했던 일은 공식적으로 인정도 안 되는 상황에서 별다른 자격증도 없이 귀국해 5년간 이런 저런 시도를 했지만 자신감만 잃었다”며 “‘루저’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았다”고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전했다.
안 대표는 귀국 직전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귀국 후 치료차 들린 국내 병원에서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 걷는게 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설상가상 갑상선암까지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 정신은 물론 육체까지 지친 상태였다.
이런 안 대표의 마음을 잡게 해 준 것은 글쓰기였다. 매일 자신 안에 들어있는 감정을 쏟아내면서 끄적거리던 글이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으로 늘어났다. 사비로 400만원씩 들여 책을 내면서 자신감 회복에 나섰다. 그 때의 경험이 지금 협동조합에서 강의 중인 ‘치유적 글쓰기’를 이끌어 낸 시작점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또 다른 인생 설계는 여러움에 부딪혔다.
안 대표는 인생 2막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안 대표 눈에 들어온 게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의 연극 강좌였다. 그는 “30세에 한 언론사에서 진행한 영화 제작 학교에서 독립영화를 찍었던 경험과 어릴 때 추억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짧은 과거 경험으로 연극 연출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글쓰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단계씩 밟아 나가면서 ‘밥 먹고 사는 일’로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17년 연극 강좌를 마치고선 무명 배우 5명과 의기투합했다. 이듬해 '50+공연집단 달콤2막'이라는 극단으로 영역을 넓혔고, 최초의 창작극 '강여사의 선택'의 대본과 연출 등 제작을 맡았다. 자신감을 얻은 안 대표는 지난해 1월 지금의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협동조합을 찾는 사람 중에는 경력 단절 여성을 비롯해 은퇴 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겪는 힘든 중년들이 많다. 이들에게 인생 2막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안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을 앓던 분이 약을 끊고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실험무대까지 선보였다. ‘말괄량이가 길들이기’라는 제목의 두 번째 창작극을 올렸다. 안 대표는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전해 볼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무대였다"고 말했다. ‘말괄량이가 길들이기’에 객원배우로 출연했던 김재익씨는 “내 나이 60대 중반에 연극을 만났다. 그 때 내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고 인생의 새로운 도전에 설레는 마음을 표현했다.
내년엔 관람료를 받는 일반 연극 무대에 나설 구상도 세웠지만,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차질이 빚어졌다. 하지만 안 대표는 연극 연출을 통해 쌓은 경험을 토대로 최근에는 동영상 제작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도 서울 서대문구와 KTV 영상공모전에 제작할 콘티가 그려진 두툼한 서류와 영상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안 대표는 "다양한 종류의 영상 공모전이 있고 많은 젊은층이 참여하는데 중년층 이상의 목소리를 직접 우리의 시각에서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KTV 영상공모전에 낼 동영상 주제도 '신중년들의 대안적 삶'이라고 했다.
안 대표는 이제 막 인생 2막의 출발점을 지났다. 이제 그는 7080세대가 되는 20~30년 후를 내다보고 있다. 안 대표는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시니어 전문 극단으로 지금의 극단을 더 키우고 싶다”며 “나이 때문에 체력이 관건이지만 1년에 한 두 번 정기 무대에 서는 전문 시니어 배우를 양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주류 연극인들도 버티기 쉽지 않은 우리의 문화 토양에서 과연 가능할까. 안 대표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있는 지금의 5060세대가 7080세대가 될 때쯤이면 지금보다는 넓은 문화 소비층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연극의 특성상 고정팬을 꾸준히 확보하게 되면 결코 상업적인 성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인생 2막을 여는 구성원들의 사회적 의미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중년이라는 나이가 사회에서 민폐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으로 살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이를 위해서는 무명의 중년들이 먼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대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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